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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돈희

등록일2021-02-06

조회수10,427

제목

중학교 교과서를 찿아서-- 노인의 날을 만든 1등 공신, 이돈희 씨를 만나다

[중학교 교과서를 찾아서] 노인의 날을 만든 1등 공신, 이돈희 씨를 만나다

 중학교 생활국어 1-2 교과서. 교육과학기술부 검정 2009. 8.19. 윤희원 교수 외 17 인 공저. (주) 금성출판사 2010. 3.1 초판 발행

 조영관 발행인

| 입력 : 2021/02/01 [00:07]

이글은 '노인의 날'을 만들자고 건의하였던 이돈희씨와의 면담 기사이다. 한 개인의 건의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며 글을 읽어보자

 중학교 생활국어 1-2 교과서. 교육과학기술부 검정 2009. 8.1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윤희원 교수外 17人 共著. (주) 금성출판사 2010. 3.1 초판 발행

1968년에 ‘노인의 날’ 처음 제정 주창

[언터뷰365 김우성] 노인의 날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지난 4월 18일, 인터뷰365닷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68년에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강조하며 ‘노인의 날’을 만들자고 외치던 이돈희 씨의 사연을 소개했었다. 당시 그는 동국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그후 3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친 그는 1971년에 제 1회 노인의 날 행사를 개최하는가 하면 방송출연, 신문기고, 사회단체 및 저명인사 방문 등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노인문제 해결을 역설했었다. 당시만 해도 노인문제에 대해 지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터라 홀로 고군분투하던 그의 외침은 더욱 값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돈희 씨의 근황을 취재하던 중 그가 여전히 자활 노인마을 건립에 인생의 마지막 꿈을 걸고 있으며 ‘노인의 날’뿐 아니라 ‘어버이 날’이 제정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연중 기념일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것이기에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관계 부서의 검토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날’과 ‘어버이 날’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느덧 이순을 넘겨 머리가 희끗해진 이돈희 씨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노인의 날과 어버이 날을 직접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1991년 유엔에서 ‘세계노인의 날’을 만들기 23년 전,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날’을 만들기 29년 전인 1968년에 혼자서 노인의 날을 만들었습니다.(웃음) 꿈 많던 스물한 살, 대학생 때였죠. 이후 몇 해가 더 지나 1971년 4월 8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고 서울 신촌에서 제1회 노인의 날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당시는 제가 서울 마포에 살았던 때이므로 마포구청장, 마포경찰서장, 사단법인 대한노인회장 등 기관장을 어렵게 내빈으로 초대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450 여분을 모시고 식순에 따른 장수상 시상, 국악인 노래와 춤, 노인의 날 제정 취지문 발표, 선물도 드리며 노인의 날을 탄생시키는 행사 자리였는데 당시 부모님 슬하에서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했던 등록금의 일부와 아버지께서 방 한 칸을 전세 놓아 마련해 주신 돈을 노인의 날 행사비용으로 했습니다. 매년 행사를 갖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대학원생의 아르바이트 수입으로는 1년후의 엄청난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밤에는 가정교사를 하고 주말에는 광화문 등에서 가판 신문을 팔았으나 역부족이었죠. 결국 이듬해 행사는 취소되었지만 곧바로 1972년에 개인이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를 차리고, 1976년에 한국노인학회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노인문제를 연구하며 외국의 노인학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 이돈희 씨가 노인 문제 연구를 위해 수집한 자료들과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의 답신 등

 어버이날 역시 혼자서 만드셨던 건가요?

그렇긴 한데 노인의 날이 만들어지던 과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원래 제가 만들자고 했던 건 ‘아버지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1956년부터 5월8일 '어머니날’이 있었죠. 제가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주 외롭게 자랐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이 매우 안 좋으셨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자주 외가에 가 계셨고, 아버지는 건축 현장소장 일을 하셔서 늘 지방에 가 계셨기 때문에 서울 월세를 든 방에서, 혼자 밥을 해먹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 가끔 서울에 오시는 아버지로부터 크나큰 부정(父情)과 감사함을 느꼈던 것이 아버지 날을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린상고 2학년때인 1963년에 1,252 명을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아버지날을 만들고, 여러 해 동안 혼자 이 아버지날을 지내면서, 신문 지면에 투고를 하며 사회에 널리 알리고 정부에서 아버지날을 제정하게 히고자 여러 신문사 방송국 잡지사 대학교 신문 등을 찾아 다니며 ,에 투고를 하고 힘닿는 대로 홍보하고 조그마한 광고를 냈지요. 이화여대 신문인 이대학보 1968년 5월20일자에 아버지날 광고를 한 것도 그 하나입니다. 이후 제가 1963년에 아버지날을 만든지 10년만인 1973년에, 정부에서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합쳐서,1956년 1회부터 1972년 17회까지의 5월8일 어머니날이, 마침내 1973년부터 5월8일 어버이날로 이 된 것입니다.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제가 노인의 날을 만들 당시에는 거의 아무도 노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에 대한 시선 역시 곱지 않았고요. 요즘 말로 튀어보려는 사람 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노인의 날 제정 취지를 설명하려고 찾아간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쫓겨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인의 날 제정을 주창(主唱)하다가, 노인의 날 만든지 25년 되는 1993년에 김영삼 정부가 새로 들어설 무렵, 당시 한국노인학회장 자격과 제가 한국토지공사에 재작중이라 정식 논설위원은 아니나 사외 논설위원으로 있어서 신문사 발행인의 배려로 노인신문(현 대한노인신문)에 신년사' 를 쓰면서 "노인의 날 제정은 새 정부의 과제" 라는 제목으로 김영삼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올렸습니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이 당선인으로서, 취임하기 두 달 전인 1993년 1월1일의 일인데, 김영삼 대통령의 새 정부가 임기중의 업적으로 반드시 노인의 날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후 3년이 지나 김영삼 정부의 종반 무렵인 1997년 10월에 노인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정부투자기관인 한국토지공사에 부장으로 재직중이었구요. 개인인 제가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고서 29년만에야 정부에서 제정되는 결실을 본 것입니다. 1990년에 UN에서 세계노인들을 위하여 세계노인의 날을 결의하고, 이듬 해인1997년에 제 1회 세계노인의 날로 제정한 이후에 이를 기념하고 있는 것도 선한 영향력을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인으로 자부하는 것은 한국인인 제가 국제연합인 UN 보다도 강산이 두번 변하는 세월인 23년을 앞서서 대학생때 노인의 날을 생각하고 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자님께 말씀드린 대로, 어버이날 역시 제가 만들었던 아버지날이 단초가 되어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개최하였던 아버지날 행사, 그리고 기존의 어머니날이 하나로 통합해 어버이날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날을 공인받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저같은 아들보다는 아무래도 딸이 아버지를 더 좋아할 것같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고 재학생 딸들과 졸업생 딸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이화여대의 신문인 이대학보 1968년 5월20일자에 아버지날 광고를 냈고, 그 3년 후인 1971년 6월12일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이화의 아버지날>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개인인 제가 아버지날을 만들고 홍보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이화여대에서 하니까 각종 유력 매체에서 이 <이화의 아버지날> 행사를 전국적인 기사와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등 많은 나라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따로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날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두 날을 합친 것입니다. 후에 언론사 간부가 된 기자분들이 제가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에 관해 기고 하고 광고 하던 당시를 기억하시고는 취재를 많이 오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노력을 뒤늦게 공인받은 셈이죠. 하하.

이화여대의 월간 영어신문인  에서도, 금년의 어버이날이 다가오자 특집 기사를 쓰고자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인터넷에서 저를 알았다고 하면서, 강성혜, 차지혜 두 기자가 지난 4월 2일에 인터뷰 왔었어요. 세상에! 이대학보에 광고한 지 무려 40년 만에 이화여대 기자들이 제가 한국의 아버지날, 어버이날의 원조시라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대학보에 아버지날을 광고할 때는 저도 두 기자처럼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은 회갑도 지났으며, 아들과 딸보다도 이런 젊은 기자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하하.

그는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에 ‘실버타운(silver town)’이라는 말을 처음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동국대 상학과를 졸업한 그는 노인들이 남은 삶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마을을 건립하기 위해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부동산학 전공 과정이 있던 건국대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에 진학한다. 부동산을 알아야 실버타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토지평가사(현 감정평가사)로 일하며, 청년시절부터 노인문제 해결을 함께하던 그에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여러 사람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1977년에 한국토지공사에 입사한다. 같은 주장이라도 당시에 그리 알려저 있지 않은 토지평기사라는 자리보다는 좀 더 공신력 있는 국영기업체 직원이라는 자리에서 일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여 년간 한국토지공사에 근무하다가 1998년에 퇴임한 그는 한국노인학회장을 거쳐 현재도 감정평가사로 일하며. 국민권익위원회 감정평가 전문상담위원을 함께 맡고 있다.

한 저명인사의 아버지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노인문제에 투신하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부정도 큰 영향을 미치셨다고요?

노인의 날이든 아버지 날이든 진짜 계기가 되었던 건 초등학교 재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던 저는 가족 간의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신다는 소식에 밥을 차렸습니다. 지금이야 쌀을 물로 몇 번 헹구고 바로 밥을 지으면 되지만 당시에는 쌀에 돌과 뉘가 많이 섞여 있었어요. 조리질을 할 줄 몰라 쌀을 신문지에 깔아 놓고 돌과 뉘를 골라내고 밥을 짓는 겁니다. 그렇게 밥을 지어도 이상하게 돌이 나와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딱’ 하고 돌이 나와도 삼키셨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그냥 드셨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져야 마땅한데 초등학생인 제가 미안해 할까봐 드시는 겁니다.. 속으로 말할 수 없는 부정을 느꼈지요. 그런 일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젖을 만지던 버릇에 낮에는 왠지 무서워 아버지 곁에 잘 안가는 제가 잠결에 모르고 아버지의 젖을 만질 때도 있었어요. 더듬다 보면 잠결에도 크기나 부드러움이 다르잖아요. 하하. 얼마나 깜짝 놀라요. 그러면 어머니 찾는 제가 불쌍헤서, 무안하지 않게 살며시 꼭 품어 주시는 거예요. (감정에 복받친 듯 그는 잠시 눈물을 훔쳤다) 이러한 부정이 모정만 못하지 않잖아요?


노인의 날과 어버이날을 제정하자고 건의한 이돈희 씨


 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당시에는 6.25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서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어머니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가정이 대부분 가난했고, 친구들도 생기가 없었지요. 수업료를 못내는 아버지 없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얼마나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겠어요. 아버지의 따뜻한 정이 더욱 소중하게 와 닿을 밖에 없었죠. 저는 고마운 아버지가 계셔서 수업료 걱정은 안하고 학교엘 다닐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하다 생각했어요. 자식들을 위해 직장에서 온갖 스트레스 받아가며 불철주야 평생 고생하시는 각 가정의 아버지들께 우리 자녀들이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효도했으면 해서 고등학생이 아버지날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살아가기 힘들고 세상 복잡할수록 그 자녀들이 효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버이날과 별도로 노인의 날을 만드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버이날은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어버이날이라 하면 1년에 하루만큼은 자식과 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데, 농촌에 계신 고령의 부모님들은 그렇지 못해요. 농사 지으며 3~4대가 같이살던 시절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지금은 핵가족으로 모두 떨어져 살고 다들 바쁘잖아요. 그래서 멀리 떨어져 사시는 노부모님과 조부모님 즉,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의 날이 별도로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과 만나기 위해 반드시 공휴일이어야 하고요.

어린이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면 노인은 공경(효도)해 드려야 합니다. 어린이날 처럼 공휴일로 지정해주면 좋겠고, 공휴일 지정이 불가능하다면 어버이날과 노인의 날을 차라리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다시 제정해 줄 것을 꾸준히 건의중입니다.

효친경로사상이 갈수록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40년 전과 비교해서 감회가 어떠신지요.?

요즘은 부모를 자식의 욕구 들어주는 사람 정도로만 알아요. 얼마 전에는 한 대학생이 어머니를 때렸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또 노부모가 자손들을 보고 싶어서 찾아가면 용돈 받으러 온 사람 취급을 해요.

어린이는 어머니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배웁니다. 부모와 조부모 사이가 나쁘면, 조부모는 부모를 미워하는 나쁜 사람, 즉 나의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적으로 생각하며 자랍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이 매우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기본은 가정입니다. 가정이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국가가 되지 않습니까? 나의 희생 없이 가정이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제는 사랑을 베풀어 보세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기자에게 "나이 50~60만 되면 직장에서 나와야 하고, 시어머니라고 별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들 낳은 며느리가 김장 30~40번 담으면 누구나 시어머니가 된다." 고 말했다. 모두가 노인이 된다는, 시간의 진리를 역설한 그의 일성은 평일에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어버이날과 노인의 날에 그 어떤 메시지 보다 강렬하게 다가 왔다. 인터뷰 365 (2008.5.13)

자료 : 이돈희 저서 『 이 지구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에게』 (2013년 10월 10일)

이돈희 프로필

UN 평화대사/아버지날ㆍ노인의 날ㆍ세계어버이날 만든이/ 국내외 위대한 도전 100人/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Presidential Champion Gold Awards 수상/대한민국 호국대상 국회상임위원장상/ 3.1운동 100주년 기념 충효경로사상 국가대표 33人/ 대한노인신문 수석부사장 겸 수석논설위원/ 대한노인회 자문위원/도전한국인본부 총재/ 가톨릭 언론인 신앙학교 심화반 회원/ 세계기록신문 월드레코드Worldrecord 대표

저서 :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 (2003년 11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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