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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2-18

조회수37,675

제목

(도전한국인26) '명시 부채전'위해 시 3만편 읽은 미술관장

'명시 부채전'위해 시 3만편 읽은 미술관장

<단독 인터뷰>서울 인사동 한국미술센터 이일영 관장(54)


한국미술센터(www.art210.com) 이일영 관장(54). 그는 우리나라 명시를 담은 부채 전시회를 위하여 시 3만 편을 읽은 별난 미술관장이다. 민간 증권경제연구소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다 종합주가지수 1000포인트가 시점에서 그만 두고 미술공부를 하였다. 한지를 통해서 접는 부채를 만든 것이 한국이 최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본에서 부채전을 성황리에 하였다. 한국 전통 초가집 모양과 봉분의 곡선과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 같은 180도 반원형 조형을 지닌 한국 접는 부채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을 홍보했다.

2005년에 광복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명시 등을 담은 부채 전시회를 가졌다. 부채 전시회를 위하여 우리나라 시 약 3만 편을 3년 동안에 읽으며 기획을 하게 된 것이다. 오래된 지도를 모으기 좋아하면서 독도 사랑에도 큰 애정이 있는 그는 일본에 독도그림의 스카프를 상륙시켰다. 그가 관장으로 있는 갤러리는 그리 넓지 않지만 좋은 행사가 진행 중이다. 예술회원인 이근배 시인등단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인사동에서 ‘이근배 시서화전’을 이달 말까지 하고 있다. 유명한 시인과 화가들이 모두 출동한 것 같다. 방명록에는 이어령,김남조,오세영,신경림,안도현,정호승 등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인사동 화랑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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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영 관장 ©브레이크뉴스

 

-어린 시절부터 화실에서 놀던 기억이 있다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요절하신 작은 아버지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2회나 큰 상을 받은

천재 화가였다. 부친께서 시골에 있는 화실을 보존하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화실이 놀이터가 되어 미술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시골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일반적인 책이 아닌 질 좋은 그림 작품들을 보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천재화가였던 작은아버지로 인해 문인과 예술인들이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언제부터 인지 그분이 추구하는 예술성을 조금 이해하면서 자연스레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20년간 인사동에서 미술관장으로 일 하고 있다.

 

- 미술관 운영 중인데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전라남도 해남의 할머니 댁에서 성장했다. 경찰이었던 어머니의 잦은 전근으로 본가에 맡겨진 것이다. 당시 할머니 댁에는 요절하신 작은 아버지의 화실이 보존돼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천재성이 다분한 예술가로서 대한민국 국전에서 2회나 수상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화실이 놀이터가 되어 작품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때로는 딱지도 만들기도 하였다. 시골에서 볼 수 없는 미술 분위기를 어려서부터 느꼈다. 일반적인 책이 아닌 질 좋은 유명 그림책은 제가 성장하면서 자연과 같이 친화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의 작품을 조금씩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면서, 그분이 추구하는 예술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 문인과 예술인들을 자주 볼 수 있어서 미술과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20년간 인사동에서 미술관장으로 일 하고 있다.

 

- 미술관을 운영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민간 증권경제연구소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하였다. 입사할 때 종합주가지수 1000포인트가 시점에서 그만 두겠다고 공표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 당시 종합주가지수 200포인트 되는 시점이었다. 1989년 실제로 장중에서 1천포인트가 되어서 퇴직을 신청하였는데 그때 회사에서 일본 노무라 증권에 단기간 연수를 권유해서 가게 되었다. 그때 일본 태평양 미술학회서 운영하는 아카데미 코스에 청강을 하게 되었다. 재일 한국인을 위한 미술사를 공부 하면서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다.

 

- 그 동안 작품 전시는 얼마나 되는지?

▲기획 작품들을 위주로 많이 하였다.`대한민국 작은 그림 미술제`라는 이름의 이 기획전은 2년마다 4회나 가졌다. 작품 가운데 90%가 신작으로 이뤄진 그림 전시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일년에 대략 20여회를 가정하면 20년간 약 400회를 하였다.

 

- 미술품도 재테크가 된다는데?

▲미술품이 투자적인 측면에서 은행자산, 부동산자산, 귀금속 자산과 더불어 포트폴리오 자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상황에서 투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액면가적인 가치가 다른 어떤 것보다 높다. 유명한 작품들이 몇 백억 되는 것을 보면 다른 귀금속보다 비싸게 된다. 과일이나 굴비세트 같은 천편일률적인 추석 선물과는 달리, 그림 선물은 신선하면서도 오래오래 보낸 이를 떠올릴 수 있어 매력적이다. 성공적인 미술 투자를 위해선 ‘이거다’ 싶은 작품이 나섰을 때 용단을 내리는 배짱이 필요하다. 미술품 재테크는 ‘타이밍’이 관건이다. 또 한 점이라도 직접 사고, 팔아 봐야 비로소 작품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꾸준한 노력과 학습을 통해 미술에 대한 안목도 길러야 한다. 미술품은 환금성이 낮은 투자 대상인 만큼 길게 보는 끈기도 필요하다. 1년 안에 치고 빠지는 단타성 투자 보다는 좋은 작품을 보유하고 장기적으로 기다리는 투자가 효과적이다.

 

▲ 이일영 관장. ©브레이크뉴스

 

-기억에 남는 기획전시는?

▲2002년에는 ‘아트월드컵’전을 기획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한국 월드컵이었다. . 고양시 1400평에서 월드컵 개막부터 폐막기간인 45일 동안 똑같이 하였다.“우리 손으로 나름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일본과의 공동개최였다. 일본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좀 더 분명한 위상을 보여줘야 했다. 가요계 100년사를 그림으로 정리한 ‘그림으로 보는 노래들’과 태극전사들을 실제 크기로 묘사한 ‘조각으로 보는 태극전사’를 포함해 총 10개의 테마를 준비했다. 모두가 “과연 성과가 있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전시는 뜻밖의 쾌거를 이뤄냈다. 태극전사들이 4강에 들면서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타향살이’를 통해서 미술전시가 강요하는 것이 아닌 소통되고 열리는 작품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가요무대 방송에서 2번이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기억에 남는 화가는?

▲최초의 입도작가로 40년간 독도를 그린 분이다. 이종상 선생님인데 40년 전에 독도를 그리신 최초의 화가였다. 고구려 벽화, 최초의 독도 작가로서 우리나라 영토와 민족적, 정신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분의 작품을 가지고 스카프 전을 열었다. 이종상 화백은 독도 영유권문제에 대하여 일본 화가들 앞에서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면서 자국의 작품 한 점도 없는 나라가 말이 되는가?, 나는 40년 동안 독도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그렸다.” 일본인들은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단순성의 감정이 아닌 적어도 한 화가가 오랫동안 정신성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일본 지식인들에게 독도에 대한 자기의 애정을 가지고 스카프 작품을 전시 한 것이다. 2008년에 이종상 화백과 일본에서 ‘독도그림’전을 추진하다가 “독도 그림을 걸면 전시장을 폭파 하겠다”는 일본 우익들의 협박에 무산된 경험이 있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언젠가는 할 것이다.

 

- 미술품 양도세에 대한 의견은?

▲현재 예술작품에 대한 양도세가 한시적으로 유예되고 있다. 양도세로 인하여 시장이 위축 되는 게 사실이다. 현재 경매로 인한 미술품 실명제가 이뤄지게 되면서 미술품에 대한 실명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세금문제는 해결되고 있다. 현재 화랑과 화가들이 영세성이 많이 있다. 양도세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지만 시기상조라고 볼 수 있으며 미술품이 경매를 통해서 매매가 발전되면서 양도세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경매는 반드시 실명제로 거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고지도(古地圖)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고?

▲ 1980년대에 서울대 이찬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내게 고지도 공부를 권유하셨다. 그래서 고지도를 구매하기도 하였다. 고지도는 연대순으로 고지도의 특성은 어떤 지도에는 지명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지명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지도는 판본과 필사본 두 가지가 있다.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기밀로 다루어졌다. 굉장한 신분이 아니면 소장을 할 수 없다. 고지도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역사적인것과 영토적인것, 선조들이 지형적인 것을 활용하고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지도가 나오기전 에는 독도에 대한 자연스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메이져 대학 근처 간다라는 고서적 거리를 아마 6년 동안에 걸쳐 한집마다 8번이상을 다녔다. 그곳을 모두 방문한것 같다. 그때 최초 독도박물관장이셨던 분도 자주 일본 고서적 거리에서 자주 만났다.

 

-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 부채 전시는 ?

▲원래 부채는 아열대 기후의 지방에서 나뭇잎을 사용한 것으로 부터 유래가 있다. 1998년 ‘부채그림’전이었다. 고흐, 르누아르 등 세계적인 화가들은 우리의 선조들처럼 부채그림을 그리곤 했다. 일본이 삼제도회(三制圖會:일본의 백과사전)를 통해 ‘날아가는 박쥐를 보고 접고 펴는 부채를 만들었다’며 자신들이 접는 부채를 처음 만들었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하지만 한지를 통해서 접는 부채를 만든 것은 한국이 최초이다. 그 당시에는 종이 기술이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80도로 벌어지는 모양새가 분명 한국의 합죽선(合竹扇) 부채였다. 한국 전통 초가집 모양과 봉분의 곡선과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 같은 180도 반원형 조형을 지닌 한국 접는 부채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중국과 일본 역시 접는 부채를 시도했지만 150-160도 벌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접고 펴는 부채가 한국인 최초라는 것은 중국의 문헌에도 있다. 고려 사신들에게서 받은 접고 펴는 그림을 넣은 부채는 귀하여 가보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 현재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이근배 시서화전 특징은 ?

▲2005년에 광복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명시 등을 담은 부채 전시회를 가졌다. 부채 전시회를 위하여 우리나라 시 약 3만 편을 3년 동안에 읽으며 기획을 한적이 있다.

우리의 말 우리의 언어가 이토록 아름다운지를 실감하기도 하였다. 이번 이근배 시서화전은 그런점에서 다른 어떠한 작가보다도 뛰어나다. 등단 50주년 기념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고민하다가 시서화전을 열게 되었는데 대부분 시인들이 자기의 시를 직접 붓글씨로 쓰는 것이 줄어들었다. 이번 행사는 여태까지의 시화전과는 다른 전시회다. 지금까지는 시서화가 따로 따로 움직였는데 이근배 시인은 붓으로 직접 시를 쓴 작품들이 특별하다. 시가 우리 삶에 멀어지는 현실에서 이 행사를 통하여 보다 우리와 가까워지게 만들고 있다.

 

- 도전에 대하여 한마디

▲도전정신이 없으면 그건 죽어 있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 대한 스스로 도전적 생각은

처음 갤러리를 시작하면서 ‘나는 징검다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예술인들의 창조정신을 전달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험적인 전시를 기획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부채전시만으로도 집 두 채를 팔아야 했다. 예술의 순수한 정신과 자유로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의 본질을 지키기기 위해 도전하고 있고, 또 특별한 기획을 진행 하고 있다.

 

- 시인 등단도 했는데 대표 시는 무엇인가?

▲‘간이역’이다. 간이역은 글자 그대로 열차가 서는 작은 정거장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종착역에 도착 전 한번쯤 간이역에 내려서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는 것이 얼마만큼 삶에 중요한지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이 들어 실감나게 느껴진다.

 

간이역

-이일영 시인

어느 간이역에 내려섰다.

어디에선가 새 생명의 첫 울음이 흐르고

누구인가 죽어가는 슬픔으로 목을 놓은 시간

세상은 아롱다롱 단풍 들 듯 그렇게 흘러가고

나는 어느 간이역에 내려 미지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상하는 바람에 부딪혀 넋 놓아 질린 하늘

부끄러운 기억들을 씻어낸 고해의 눈물자리에

순백한 낮달이 약속처럼 떠 있었다.

주섬주섬 챙겨온 삶의 공허처럼 쓸쓸한 간이역에서

체온으로 남은 겹겹의 그리움을 깨물면

수천 촉의 화살이 날아와 온 몸을 뚫고 있었다.

광장에 선 나무에 기대어

허망하게 흘린 삶을 참회하며 화살을 뽑아낼 때마다

아득한 기억들 피를 흘리고 또 한 점의 살이 묻어 나왔다.

나무의 무성한 잎들은 소슬바람을 핑계 삼아 푸른 눈을 떨고

저만치 눈치를 살피는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끝내 나무에 들지 않았다.

낯선 땅의 향기가 천천히 몸을 맡겨오면

한적한 읍내의 산등성이를 깊은 숨으로 더듬어가고

늦가을 촉촉한 먹빛으로 번져오던 산 그림자는

석양의 끝자락을 당겨 나의 낯가림을 감추었다.

광장에 길게 누운 그림자를 따라 하나 둘 불이 켜지면

사방으로 그림자가 서는 두려움에

대합실로 돌아와 다시 열차를 기다렸다.

계절은 줄을 당기며 세상을 오가지만

시간 속으로 가는 열차는 끝내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에

열차를 기다리는 내내 속내의 기침소리만 깊어지고

멀리 산 모퉁이를 밀치고 세상을 가르는 기차가 오면

총총히 짐을 꾸려 대합실을 나서는 행렬을 따라

간이역 출입구를 연신 돌아보며 열차에 오르는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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