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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3-06-06

조회수39,260

제목

(도전한국인37) 클래식, 팝송까지 연주하는 ‘별종’ 국악인

클래식, 팝송까지 연주하는 ‘별종’ 국악인 -천익창 씨 인터뷰

 

 

가야금을 두 대, 혹은 세 대를 나란히 놓고 열 손가락으로 자유자재로 연주를 한다. 혹은 자신이 만든 철선으로 된 ‘창금’을 놓고 국악과 민요, 클래식 등 장르를 넘나들며 아름다운 선율을 울린다. 보수적인 국악계에서 40여년 간 개량 악기를 연구해 오면서 정통 국악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바로 국악계의 ‘별종’ 천익창 씨다. 특히 그는 자신의 연주법을 아들 천새빛 군에게 전수했고 아들의 연주 동영상이 UCC에 올라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어떤 연주법을 구사하나?

▲우리나라 전통 가야금은 원래 열두 줄이다. 그리고 연주할 때는 기본적으로 오른손 세 손가락으로 연주를 한다. 왼손은 ‘농현’이라 하여 바이브레이션을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들은 열 손가락으로 서로 다른 재질과 음역을 가진 두 대(23현 1대와 25현 1대), 혹은 세 대의 가야금(저음, 중음, 고음의 12현 가야금)을 함께 놓고 동시에 연주한다. 서로 다른 악기를 동시에 연주함으로써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낼 수 없는 놀라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동·서양음악의 융합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크로스오버’음악이다. 그가 연주자로 활동한 것은 20살 때인 1973년부터. 1984년엔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해 자신의 개량 가야금을 소개하기도 했다. 1987년 12월 13일엔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의 양․국악의 만남>이라는 연주회도 열었다. KBS 양악 관현악단과 천익창 씨가 협연한 공연이었다. 그는 직접 개량한 가야금(창금)을 가지고 ‘로망스’와 ‘새타령’을 연주했다. 그런데 공연날이 자신의 결혼식날이었단다. “하하. 오전에 종로 서울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부랴부랴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와서 리허설도 못하고 무대에 올랐어요. 그 바람에 신혼여행도 못가고 그 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악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이고 학교공부는 안동에서 했다. 초등학교시절 그림을 잘 그려서 학교에서 상도 받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예능에 관심을 갖는 걸 싫어하셨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악기 연주이다. 연주는 그림처럼 증거가 남지 않으니까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안동에서 처음으로 황병창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기타는 조동욱 선생님을 졸졸 쫓아다니며 배웠고 피아노는... 안동에 음악가가 오면 무조건 찾아가서 배웠으니 모두 기억조차 할 수 없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방이 여러 개라 어머니가 그 방을 세를 주고 받을 돈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타다가 레슨비로 썼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음악 배우고 다니는 걸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몰랐다.

-서양악기보다 국악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큰형님이 내겐 아버지였다. 형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교대에 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오직 음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예비고사 날도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시험날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왜 시험을 보지 않았냐고 형님이 물어서 음악을 하겠다는 말은 못하고 얼결에 ‘졸업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 후 짐을 싸가지고 약 40일 간 봉정사 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혼자 있게 되었다. 거기에서 꿈속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 소리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는 경험을 했다. 꿈속에서 들은 그 감동적인 소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우연히 약장사의 공연을 보다 아쟁이라는 악기를 알게 됐다. 그 소리가 꿈에서 들은 그 소리하고 너무도 비슷해 그걸 배우려고 악사한테 어디 가면 배울 수 있냐고 물으니 악사가 “서울, 서울~”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꿈속에서 들은 그 음악을 재현하기 위해 오늘까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는?

▲내게 공식적인 타이틀이나 남들에게 인정받은 업적은 없다. 2007년경 아들이 인터넷에 발표한 연주 동영상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올린 감동의 글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 제1회 대한민국 UCC동영상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2007년 천익창 씨의 아들 천새빛 군이 ‘48현 개량 가야금’으로 캐논 변주곡을 연주한 동영상이 UCC에 올라 열흘 만에 클릭수가 30만여 건을 기록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자(父子)의 연주에 감동받고 좋아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지만 실제로 연구가 진척될 수 있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외면한다. 보편적인 것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ET, 외계인, 별종 등의 별명이 붙기도 했다.

 

-창작곡 ‘오솔길’이 무척 인상 깊었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때 학교수업 끝나면 집에서 가야금 교육을 받았다. 아이가 힘들어 할 때, 내가 같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솔길’은 아이하고 같이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실 내가 만든 악기라 가르쳐 주려해도 이 악기를 위한 곡이 따로 없어서 곡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오솔길도 열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곡인데 들어보면 양손이 대화하듯이 선율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게 바로 오솔길을 지나는 아이와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연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적은 있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계속 연주자 생활을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집에 들어앉아 연구를 했고 아내가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내가 처음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같은 서양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음대 작곡과를 응시하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그 후에 미 8군에 스카우트 되었다. 거기서 건반악기를 연주했다. 그러다가 당시에 인기가 많던 민요가수들을 위해서 오르간 옆에 가야금을 함께 놓고 연주 했다. 무대에서 강한 조명을 받으며 연주를 하다 보니 가야금 줄이 열에 쉽게 늘어져 음정이 맞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 현장에서 쓸모 있는 악기를 만들려고 계속 고쳤는데 그것이 바로 ‘개량 악기’를 만들게 된 계기다.

 

-서울에서 연주를 많이 한 곳은 어디인가?

▲1974년 경 명동에 가면 livehall(극장식당)이라 불리던 큰 공연장들이 많았는데 그 많은 홀 중에 내가 연주를 안 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 무대에서 전자오르간, 가야금을 연주 했었다. 내 Livehall 마지막 무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동 롯데호텔에 있는 스카이 프라자였다. 당시 인기가요나 팝송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내가 무대에 서는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그 큰 홀에 가득 찼다.

 

-유튜브에 선생님과 아들이 연주한 동영상이 많다. 언제부터 연주 동영상을 촬영하게 됐나?

▲2007년 아들의 연주 동영상이 크게 화제가 됐는데 어느날 그 영상이 갑자기 삭제된 것을 볼 때 너무 허탈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2010년 4월부터 자료를 정리하여 유튜브에 직접 올리게 되었다. 인터넷은 내가 현장에서 힘들게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지 않아도 남들이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아들이 군 입대하기 전에 그 간에 연주했던 레퍼토리들을 모두 동영상으로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개량 가야금의 발전가능성에 대해 말해준다면?

▲사람들이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왜 아들에게만 가르치고 다른 제자를 두지 않았느냐?”는 것 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내 밑에서 십 년이 넘게 온갖 고생하면서 힘들게 배웠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갈고 닦은 장기로 전문예능대학을 가지 못한다.

아들이 고교시절 음대 여러 곳을 찾아가 교수들 앞에서 연주하고 진학에 대한 협조를 받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아무리 열 손가락으로 기막히게 연주를 할 수 있어도 받아주는 대학이 없다. 개량 악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이 길을 걷게 하고자 강요하겠는가? 그리고 또 창금을 전수받을 제자를 찾으려고 안했던 게 아니다. 1976년부터 국악계 영향력 있는 관련자를 비롯해 청와대에 진정을 넣어 ‘내가 제자를 키울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고 수없이 부탁을 했지만 그런 노력들이 계속 제도권에 가로 막혀왔다.

실제로 음악학원에 가면 어떤 악기는 6개월 완성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장담 못하겠다. 요즘은 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 가끔 부모들에게 연락이 와 “이거 해서 어느 대학 갈 수 있느냐”이다. 대입이 최우선이다. 이제 내가 죽고 내 아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이 기능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들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고생한 걸 다 보고 자랐으니 현실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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