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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2-08

조회수42,186

제목

(도전한국인2) 이경태, 30년 간 대통령 연설 최다 연설가

 

이경태, 30년 간 대통령 연설 최다 연설가

<단독 인터뷰>한 뜻으로 한 길, 올곧은 말을 하는 작은 거인


"아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단 말이냐~"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하는 신파극은 변사의 역할이 있었기에 우리의 더욱 심금을 울렸다. 무성영화를 상영할 때 현장에서 대사를 해설해주던 변사의 인기는 오늘날의 최고 배우의 수준이었다. 또 하나의 인기인은 선거철에 후보들을 홍보해주는 연설원이다. 특히 대통령 후보 연설장에는 유명 후보자들의 얼굴을 보기위해 구름처럼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넓은 공간에서 마이크를 잡고 후보자 유세를 지원해주는 연설원의 걸죽한 입담과 당찬 목소리로 분위기를 돋우고 관중들을 압도하게 하였다. 30년이란 세월동안 오직 한길 대통령 연설원 으로 살아온 우직한 분, 미당 서정주 시인과의 인연으로 ‘국화 옆에서’를 좋아하게 되었다는데 추억의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가보자.

대통령 연설가로 활동한 기간이 국내에서 가장 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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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태 ©브레이크뉴스

▲그렇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이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故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원 이었다. 그 기간을 한길로 함께 하였다. 김 대통령은 1971년 처음으로 대통령 출마하여 감옥 투옥, 사형선고 등 힘든 시기를 보내셨다. 그리고 1987년 2번째, 1992년 3번째, 드디어 1997년 4번째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연설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는 그것을 기록으로 인증받기 위해 연설원 으로 있던 것은 아니며, 변치 않는 소신의 세월이 쌓여서 특이한 경력으로 남았다. 세계적으로도 동일한 대통령 후보 연설로 30년 이상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대통령 연설원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무엇인지?


▲1949년 전북 정읍군 고부면에서 빈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랑스러운 나의 고향 고부는 왕권시절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 동학 혁명의 진원지였다. 동학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인 전봉준의 무용담을 들으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때에도 선거가 많았는데 선거유세를 빠지지 않고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주경야독 하는 시기인 1970년 10월에 청량리 시장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반해버렸고 나도 저렇게 연설을 잘 해야지 하는 결심을 하였다. 1971년 4.27 대선 연설원 으로 전북에 파견되어 열심히 하였고 큰 박수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훗날 대선 때마다 유세위원을 도맡았다.

 

-지난 과거를 돌아볼 때 남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최장 기록이나, 최다 연설 횟수, 이러한 것은 별로 마음에 남지 않는다. 삼십 년간, 이리저리 정치판에서 ‘줄’을 바꿔 서지 않고 외길을 간 것이 중요하다. 나는 자신의 뜻을 쉽게 바꾸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남고 싶다.

 

-정치가로 직접 나서 활동한 경험은 있는지?


▲일을 원하는 자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일을 하는 자에게는 문화생활의 여건을 만들어 주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가르치고, 모든 국가시험에서 학력조건을 폐지하여 학력이 아닌 능력을 우선평가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1981년 고향인 정읍에서 처음 출마하여 낙선한 뒤, 서울에서 3번 출마하여 떨어졌다. 그러니 나는 완결자가 아닌 진행 중인 정치 지망생이다. 2012년 4월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정치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말하고 싶다. 이 땅에 태어나면 국가를 보존발전 시켜 후손에게 물려줄 의무가 뒤 따른다. 하지만 현실의 영달만 꾀하며 내일을 잊은 채 살아가는 정치인들에게 사후(死後)를 한번쯤 뒤돌아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우리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의 묘소를 역사의 심판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면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연설은 누구에게 배웠나?


▲한국심리 변론 학원에서 해공 신익회 선생님의 한강 백사장 연설회의 명 사회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송병권 원장에게 배웠다. 한때 원장 밑에서 강사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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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이경태씨. ©브레이크뉴스

 

-연설가로써 특별히 기억 남는 장소는?


▲보라매공원에서 백 만명 청중을 상대로 외치던 때이다. “군사독재 정권 청산하고 민주정권 수립하자.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나의 연설에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청중이 많으면 많을 수록 선동하는 연설은 청중들에게 호응이 높다. 그 순간의 희열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특히 나의 선동연설은 독설이 많아 인기가 있었다.

 

-가장 길게 연설한 경험이 있다고?


▲1971년 4월 전북 부안군 무안읍에 있는 부안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 것이다. 그 당시 호남의 도로여건이 좋지 않았다. 1시간 정도의 시간을 배정받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오셔야할 김대중 후보는 오지 않고 곧 온다는 메모지만 5번이나 올라왔다. 4월이라 아직은 차가운 계절이었지만 와이셔츠가 땀에 젖어 갔다. 오직 연설장에 모인 청중들을 그냥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에 마이크를 놓지 않고 한 것이다. 마침 전북도당 위원장이신 유청 의원이 먼저 도착하여 마이크를 전달하고 연설은 마무리 되었다. 부안지구당 청년부장 박부영 선배가 "고생했어, 3 시간 반이나 지났다. 잘 했어."라고 얼싸 안아주었다. 유청 의원의 인사말이 7~8분정도 시간을 끌고 있는 가운데 김대중 후보가 운동장에 도착하였다. 내가 다시 연단으로 올라가 " 존경하는 부안의 부모 형제자매 여러분 드디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일 질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외치자 청중들은 김대중 후보자를 에워싸며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가장 길게 한 것이 3시간30분 이었다. 김대중 후보자는 1964년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늦추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연설을 하셨다.

 

-대통령 연설 후보자를 위한 공식 연설자는 누구인가?


▲그때 선거 유세는 연설하는 사람이 넷이다. 지역유세 위원장, 지역 위원장, 중앙당 파견 연사, 그리고 후보자 였다. 나는 그때 중앙당 파견 연사였다.

 

-다른 후보자의 연설 제의를 받은 적이 없었나?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했다. 삼십 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 또한 세계기록이다. 나는 그 삼십 년간 그의 연설원으로 네 번이나 선택받았다. 그래서 민주당이 낸 ‘대통령과 함께한 100인’이라는 책에 내 이름도 올라가 있다. 000 전(前) 대통령이 나를 유세위원장으로 부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만약 그때 갔던 라면 전국구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난 참 바보같이 산 사람이다.

 

-삼청교육대에도 다녀온 적이 있다던데.


▲김대중 대통령이 유신헌법이나 사회 비판을 많이 하고 고난도 많이 겪은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 분의 ‘민주구국선언’이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활동이 전두환 정권 실세들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결국 1980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당시 도봉산 계곡 넓은 바위에서 시국이야기를 하다가 막걸리 잔에 울분을 담아 토해냈다. 어느 사람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힘이 장사였던 나와 몸싸움이 벌어지고 '공무집행 방해죄'로 삼청교육대에 가게 되었다. 그 이유로 내가 논설위원으로 있던 청소년 신문은 폐간이 되어 선배이신 황동채 사장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곳에 다녀온 후 엄지발톱이 빠지고 제대로 나지 않아 아직도 고생한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였고 부끄러운 일이다.

 

▲ 이경태 ©브레이크뉴스

 

-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소감이나 대우는 어떠했나?


▲소감은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덤덤했다. imf위기 해결, 남북통일, 부정부패 척결, 사회 화합(지역차별) 등 역사의 사명이 산적해 있었지만 대통령이 잘 해내리라 믿었다. 나에 대한 대우는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리만족이 큰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청와대에는 가본 적이 없다. 청와대에서 불러줘야 가는데 보좌진들에게 잘 보인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서운은 했어도 억울하지는 않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를 불러서 쓴 게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목수들이 자기가 살 집만 만드는 게 아니다.

 

-평소 가슴에 담아둔 말은 무엇인가.


▲내 명함에 새겨진 슬로건이 있다. ‘오직 한 길’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정계은퇴를 선언하신 뒤에, ‘공부하시오, 그리고 내일에 필요한 사람이 되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인데, 현재 민주당에 대해 한 마디 해 달라.


▲지금의 민주당은 중도(中道)를 벗어나고 있다. 중도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전진하는 민주당이 되어야 하는데 열린우리당과 합당 후 좌로 치우쳐 있다. 민주당은 1955년 9월18일 신익희, 조병옥, 장면, 곽상훈,백남훈 씨를 비롯한 민주세력들이 자유 민주 진보에 바탕한 중도 실용주의를 근간으로 하였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 한미동맹을 중시하며 안보를 발전 수평적 정권 교체까지 이뤄냈는데 최근 전당대회에서 '중도'가 빠졌다. 아쉽기는 하지만 금년 말로 예상되는 전당대회에서는 '중도'를 다시 넣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복지정책은 민주국가의 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꽃은 관리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무상급식과 등록금 절반정책은 찬성하나 의료보험료를 무상으로 하겠다는 것은 과욕이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고령사회로 급진 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복지를 지나치게 앞세우다가 실패한 외국 국가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당은 보수 혹은 진보 중 어느 한 쪽의 성향을 띠는데, 중도는 어떤 의미를 갖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성향을 양분화 하기는 어렵다. 보수 세력 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우 세력이 약 10% , 온건세력이 10%가 되는데 보수라고 한다. 진보도 극좌가10%, 진보세력이 10% 되는데 진보라고 부른다. 결국 양쪽 20%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60%가 중도세력이다. 이 세력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움직이면 결과에 큰 영향을 준다. 1997년 대선 때 중도가 움직여서 정권교체가 가능했고, 노무현 정권이 좌로 치우치자 중도가 움직여 530 여만 표 차로 이명박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명박 정권이 극우 성향을 갖자 작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한 것이다.

 

q :실제 대통령 선거 연설문을 조금이라도 듣고 싶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렵니다.“ 이는 길옥윤씨가 작곡하고 패티 김이 노래한 ‘서울의 찬가’라는 일부이지만 서울의 찬가와 같은 희망의 서울,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후보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단일 후보 김대중,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후보입니다! (중간 생략)

 

▲ 이경태 ©브레이크뉴스

 

-현재 또 도전하는 것이 있다면?


▲도전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지만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배가 나오고 몸무게가 90kg이나 되어 뱃살 빼는 다이어트를 해 1개월 반 만에 4.5kg이 빠졌고, 70kg까지 뺄 계획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결혼 주례자 이셨는데 어떤 인연이 있는지?


▲미당 선생님은 우리 고향 옆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신 분이다.

나는 동적(動的)이기 때문에 부족한 정적(靜的)면을 보완을 하기 위해 출생이 비슷하여 존경하며 따랐다. 미당 선생님은 담배를 무척 좋아 하셔서 사모님은 못 마땅하였다. 가끔 예술인 마을에 있는 집에 찾아가면 아들 같은 인생 후배인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포도주와 같은 와인 술을 좋아하셨고, 건배를 함께 하며 다정다감 하셨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주례를 요청을 하였고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때 주례사의 말씀중 “국회의원이 되어서 약자의 편에서 일해 달라.”고 하셨다. 그 후 000 대통령을 ‘떠오르는 태양 같다.‘라고 표현하셔서 그때부터 멀어졌다. 지나고 보니 노벨 문학상 수상에 관심을 갖고 국가에서 나서주기를 바란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못 타신 게 너무 아쉽고, 아마도 토속적인 시 언어를 번역하면서 외국인에게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

 

-미당 서정주 시중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당연 ‘국화 옆에서’ 이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다.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같이 생긴 꽃처럼 겸손함과 원숙함이 묻어 있는 그 시가 지금 내게 더욱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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