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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3-06-06

조회수32,644

제목

(도전한국인40) 어버이날’, ‘노인의날’ 만든 1등 공신 이돈희 씨

지하철 패륜남, 패륜녀도 다 노인 됩니다

도전서울人6-‘어버이날’, ‘노인의날’ 만든 1등 공신 이돈희 씨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이다. 최근 사회에서 논란이 된 '지하철 패륜남, 패륜녀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런 때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노인의날’은 누가 만들었을까?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초대회장일까? 정부기관일까? 아니다. 사실 ‘노인의날’은 20세를 갓 넘긴 청년이 만들었다. ‘노인의날’뿐 아니라 ‘어버이날’이 제정되는데도 앞장선 이돈희(64, 감정평가사) 씨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의 청년은 이제 흐르는 세월과 함께 회갑을 훨씬 넘겼다.

 

- ‘아버지날’을 고등학생 때 만들고 신문광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다닐 때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5월 8일이 '어머니날'인데, 가정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아버지들도 자녀들로부터 당당하게 사랑의 카네이션을 받을 수 있게 해야겠다고 말이죠. 5월 8일이 '어버이날'이 된 것은 1973년이고 당시엔 ‘어머니날’이라고 했어요. 그때 천 명이 넘는 사람을 직접 만나 ‘아버지날’을 언제로 하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어머니날’이 봄에 있으니 ‘아버지날’은 가을에 만들자 해서 10월 8일로 정했죠.

이렇게 해서 ‘아버지날’을 만든 후에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 잡지사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지만, 고등학생이 만든 것이라 장난정도로 생각하더군요. 어느 곳 하나 잘 호응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독자투고도 많이 했지만 성과가 없어서 1967년부터는 당시 우리나라의 4대 일간지였던 조선·중앙·동아·한국일보에 작은 광고를 냈습니다. 동국대학교 학생이던 당시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광고를 냈는데 돈이 부족해 아주 작게 낼 수밖에 없었죠. 1968년에는 앓던 결핵이 재발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광고비가 훨씬 저렴한 곳에 광고를 했죠. 그중 하나가 이화여대 신문인 이대학보(梨大學報)입니다.

 

- 이대학보에 광고를 한 것이 ‘어버이날’을 만든 단초가 된 것 같군요.

▲ 네, 그런 셈이죠. 아들보다는 딸이 아버지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딸들이 다니는 이화여대에 ‘아버지날’ 광고를 하게 된 것이지요. 제가 이대학보에 광고를 한지 3년 만인 1971년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처음으로 '이화의 아버지날' 행사를 했지요. 이대학보에서 그 광고를 본 1학년 학생들이 4학년이 된 후 그 기억을 되살려 '이화의 아버지날'을 만든 것이지요. 제가 1968년 5월 20일자 이대학보에 광고한지 무려 40년이 되는 2008년에, 역시 이화여대신문의 하나인 영어신문 이화보이스 기자들이 우리나라 ‘어버이날’의 유래에 관한 기사를 쓰려고 자료를 찾다 알게 됐다며 저를 찾아와 인터뷰를 했어요.

 

- ‘아버지날’을 만들었는데 실제로 아버지에 대한 정이 각별한가요?

▲ 병약하시던 어머니는 제가 13살이 되자 더욱 편찮아지셔서 시골 외가로 가시고, 아버지는 부산에서 일을 하시게 돼 저는 혼자 밥을 해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지요. 아버지가 서울로 출장오신 어느날 제가 밥을 해드렸는데 '딱'하는 소리와 함께 움찔 하시는 겁니다. 돌을 씹으신 게지요. 그런데 그걸 삼키시더라고요. 어린 제가 미안해 할까봐 씹으신 돌을 꿀꺽 삼키셨어요. 그게 부모님 마음입니다.

한번은 혼자서 냄비에 밥을 짓다가 숙제하느라 거의 절반을 태운 적이 있어요.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저는 배가 고파서 먼저 먹었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아버지는 "잘 했다" 하시며 한 숟가락을 뜨시고는 "사실은 나도 먹었다"라며 상을 물려주셨어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제가 밥을 안 먹었으면서 먹었다 한 것을 눈치채시고 상을 물려주셨음을요. 어린 마음에도 그런 아버지 사랑에 감사했어요.

 

 

- ‘노인의날’을 만든 계기는 무엇인지요?

▲ 1968년 대학교 4학년 때 일입니다. 75세 할아버지께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구걸을 하시는데 양복에 구두 차림이더군요. 이상하여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은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이고 며느리는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사람이랍디다. 그런 자식들이 소홀히 돌보아 구걸을 다닌다는 겁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50대 딸이 80세가 넘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겠다고 하셨어요. 아무리 경로효친사상이 희박해가기로서니 부모자식 간에 이래서 되겠는가싶어 많은 노인정과 경로당을 찾아다니면서 노인들의 실태를 알아보고 노인복지를 생각하게 됐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노인의날’을 국가에서 지정하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노인의날’을 만들었지요. 제가 노인의 날을 만든지 29년 만에 법으로 제정되는 결실을 보았습니다.

 

- ‘노인의날’ 행사를 대학생 때 직접 주관했다고요?

▲ 20대 대학생 때 노인의 날을 만들고 1971년 4월 8일에 직접 ‘노인의날’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서울 신촌의 한 예식장을 빌려 450여 분의 노인을 초대해 음식과 기념품을 제공하고 국악인의 노래와 춤을 곁들인 행사를 했지요.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의날’을 만들자고 외쳐도 다들 시큰둥해하니 여론을 만들기 위해 시범 행사가 필요하다 판단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최초의 ‘노인의날 제정 취지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제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이 서울 마포였습니다. 그래서 지역기관장인 마포구청장, 마포경찰서장, 초등학교 교장은 물론, 사단법인 대한노인회장, 김현옥 전 서울시장도 참석했죠. 3년 간이나 노력해서 만든 행사였어요.

 

- 행사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대학 친구들이 바둑 두러 가자거나 영화 보러가자 해도 그럴 수 없었지요. 대학생활의 낭만이란 것을 포기하고 주중에는 과외를 하고, 주말에는 광화문에서 신문을 팔았지요. 몇 년을 아르바이트 해 모아도 행사 비용이 모자라 아버지를 졸라 방 한 칸을 전세 놓아 그 전세보증금을 보탰어요.

 

- 젊은 사람이 ‘노인의날’을 만들자고 하니,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 젊은 사람이 자신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매달리니 의아해 했지요.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선거라도 나가려고 하느냐, 우리 노인들을 핑계로 사회에 손 벌리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어요. 전문가들도 저를 곱게 보지 않았어요. 대학 교수나 강사도 아닌 사람이 1972년에 한국노인문제연구소와 1976년에 한국노인학회를 만들었으니 말이죠. 저는 직업도 노인문제와 관계없는 감정평가사였고 나중엔 한국토지공사에 근무했거든요. 지금은 방송이나 신문에서 저를 찾아주지만 처음엔 ‘노인의날’자료를 들고 찾아가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마침내 1997년에 매년 10월 2일을 ‘노인의날’로 정하기로 했죠.

 

- 부모님의 건강은 어떠하셨는지?

▲ 아버지는 젊을 때는 비교적 건강하셨지만 69세부터 암수술과 투병을 반복하시다가 2005년에 8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병약하셨는데, 69세 때부터는 심한 노인성 우울증과 조울증이 반복되고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셨는데 5년 전부터는 전문요양원에서 지내시고 계십니다. 한 달에 한 두 번 아내와 함께 찾아뵙고 있습니다.

 

-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요?

▲ 효도란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께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나이 탓으로 돌리는 것 이상의 패배는 없지만 이미 회갑을 훨씬 넘긴 제가 계속 경로효친사상을 말하면 세월의 변화를 도무지 모르는 고집쟁이, 옆구리 찔러서 하기 싫은 절 억지로 받으려는 기성세대 밖에 안 될 것이지요. 결핵도 앓고 암 수술도 받다 보니 기본체력도 한 해 한 해 쇠약해지고 있어요. 나이에 장사 없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지요. 그래서 이제는 이런 일에 뜻을 둔 젊은이나 후학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인간은 질병이나 각종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지 않는 한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며느리가 30~40년 후엔 시어머니나 장모가 되고 40~50년 후면 노인이 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효친과 경로의 문제는 남의 문제 같지만 바로 자기의 문제요 모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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