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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2-18

조회수42,256

제목

(도전한국인5) 17세학생 학교설립, 최연소 학교장 전억찬

17세학생 학교설립, 최연소 학교장 전억찬

<단독 인터뷰>가난 대물림 끊을수있는 기술학교세워 성공한 장본인

전억찬(63세)씨는 17세 학생으로서 맨손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올법한 야간학교가 바로 강원도에 있는데 황무지를 개간하고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면서 땀이 베인 학교가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고난을 이겨낸 것이다. 기나긴 겨울의 눈바람 속에서도 싱싱한 상록수의 심상과 농민운동을 향한 소설 속 주인공의 푸른 의지가 오버랩 되는 것은 왜 일까?

 

소설속의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름방학 농촌계몽운동으로 인연이 되어 만나고 학교건립을 위해서 백방 노력하지만 어려움에 처했다. 17세이던 전억찬 고등학교 1학년생은 동네 공회당에서 야간중학생 8명을 가르치면서 어렵게 개교 하였다. 돈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반듯한 학교를 세웠다. 환하게 맞이하며 웃는 그에게서 상록수의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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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억찬 ©브레이크뉴스

 

- 최연소 학교를 설립하셨는데 몇 살 때 인지?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문맹퇴치 및 농촌계몽 차원으로 이동수업을 해오다가

1966년 5월 9일 망상리공회당에서 학생 8명으로 망상야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때 묵호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이었으며 당시 나이 17세였다.

 

- 교장으로 근무하는 학교는 어떤 학교인지?


▲1968년 묵호재건중고등학교로 개편하여 경상북도 울진, 충청북도 제천, 강원 일대 남녀 청소년들에게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기술 뿐이라 생각하고 기술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인근 도시나 서울 정수직업훈련원에서 폐차의 부품과 실습에 필요한 공구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 골목을 수없이 다녔다.

1986년에 문교부지정 동해공업학교로 학제변경, 동해공업고등학교, 동해자동차공업고등학교로 특성화 교육 시행하고 중장비운전 국가기술자격 실기시험장으로 유치하였다. 2007년부터 현재 학교이름인 강원산업중고등학교로서 강원도 유일의 산업기술인 양성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학교주소: 강원도 동해시 초구동 마상천길 77호 강원산업중고등학교. tel. 033)534-3301~2 학교홈페이지: http://kwin.h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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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를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선각자 중에는 이준열사, 유관순, 안창호 선생을 존경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국에는 애국을, 사회에는 인물을, 산에는 나무를 심자”고 하셨다. 사람다운 인물을 심고 싶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숨 쉬고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기술이라고 생각하여 기술계통의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 마을에도 언젠가 중고등학교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현재 학교는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강원산업중고등학교 졸업생 중등 11회, 고등 42회 총 2 천여명을 배출하였다. 국가기술자격증 3종목 이상 최고 12종목 취득자만 졸업하는데 매년 전 졸업생이 국가기술자격취득 300%(취업, 대학진학 100%) 14년 전통으로 이어지고 졸업식장은 축하의 장이 되고 있다.

 

- 무일푼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궁금하다.


▲학교를 설립하고 마을공회당에서 천막에서 단칸방 교실로 이동하면서 학교를 신축하기 위해 벽돌 한 장 모으기 등 영동지역을 3년 여 기간동안 순회모금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3칸 교실을 마련하여서 학교답게 되었다.

학교부지가 예로부터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가시밭 황무지(하천부지) 5 천여평을 밤낮으로 개간하여 하천물길을 바로 잡고 뚝을 쌓고 마을안길(도로)을 개설하였다.

강원도지사에게 요청하여 80㎡의 다리를 놓고 우마차가 겨우 다니던 오솔길을 시내버스가 다니는 부농의 마을로 변모시켰다.

흑판과 교과서는 다니던 학교에서 얻어오고 교과서는 돌아가면서 함께 읽고 책상이 없어 공회당 의자를 서로 맞대놓고 촛불을 켜고 수업을 해왔다. 마을 어른들께서 지나가시다 초 한자루를 사주셨을 때는 밖에 나와 몰래 울기도 하였다.

70년 초에 와서는 호롱불을 켜놓고 수업을 하다가 동네 남자아이들이 수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쇠스랑으로 호롱불을 찍어버려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수업을 듣던 김순덕 여학생은 화상을 입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았다. 그 때 일로 경찰서도 가보고 병원비를 보태주지 못하는 대신 오랜시간 병원에서 여학생을 간호해야 했다. 제2의 건물 150평을 신축하다가 돈이 없어 중도에 세워두었는데 여름 장맛비와 태풍이 몰아쳐 밤새 모두 폐허가 되어버렸다. 자재비와 인건비를 주지 못하여 공사업자들로부터 잠옷차림으로 산으로 도망치던 일, 가족들이 추운 눈밭에서 업자들에게 눈물로 부탁하던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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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억찬 ©브레이크뉴스

 

- 어린시절 추억이 있다면?


▲ 아버지는 농사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광산 신개발에 관심이 많으셨다. 어머니는 나무장사와 과일행상을 하며 남의 집에서 일한 삯으로 미역이나 생선을 받아와 반찬으로 하셨다. 부모님이 항상 밤늦게 오셔서 어린 나이에 배고파 울다 지치고 밤이 너무 무서워서 베개를 안고 잠이 들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저녁밥을 지어서 동생들을 먹이고 집안일을 챙겨야하는 가장 아닌 가장이었으며 장남으로서 가난에 지친 무거운 책임은 중학교 1학년부터 버거워 졌다. 밤에는 먼 산에 올라가 도벌을 해서 장작을 만들어 새벽 5시에 어머니를 따라서 경찰 초소를 피해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바닷가를 걸어서 묵호시내로 한 짐에 400원 정도 받고 나무장사를 하였다. 오징어가 많이 나는 여름철에는 새벽 3시부터 동생들과 같이 묵호항 부두 어판장에서 오징어 내장을 주워 한 드럼통에 450원에 팔며 생활을 이어 나갔다.

 

-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 말해 달라


▲ 7남매 중 장남으로 가정환경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공부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장남은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중고등학교를 입학시켜 주었다.

그러나 농촌에서 학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고 중학교 2학년부터 가정교사, 신문배달, 막노동, 세탁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태면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였다.

학생으로서 공부도 해야하지만 돈을 조금씩 모아서 중 3학년 시절부터 농촌마을마다 흑판을 메고 이동학교 수업을 실시하다가 나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망상공회당을 빌려 망상야간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 학교를 운영하면서 현재 어려움이 있다면 ?

 

▲ 강원산업중고등학교는 법인체 일반학교가 아니라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 학교로 외부지원이 미미하여 부설로 중장비학원을 하는데 학원 수입 거의를 학교에 조달하고 있다. 희망이라면 하루속히 법인체 학교(국회계류 중)로 정상적으로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육기관으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특히, 일반학교에서 일탈생(한국일보 2011.05.19: 전국 6~7만명), 범죄노출생, 저소득층가정 학생 등을 관내 및 타 시도에서 받고 있지만 급식소와 기숙사가 없어 고민하다가 강원도 2억, 동해시 2억원을 겨우 확보하였으나 4억 정도가 부족하여 도교육청에 요구하여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며 실습시설 확충이 시급한 실정이다.

 

- 학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가장 힘들었던 추억은?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독립하였던 시기라 집에 가면 반찬도 챙겨올 수 있지만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집에 자주 갈 수 없었다.

낮에는 학교를 짓기 위한 벽돌을 만들고, 가시밭 황무지에서 바위돌을 캐어냈다.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절에 배가 고파 논밭에 배추뿌리를 캐먹고 거의 세끼를 장국수에 감자나 좁쌀을 넣고 생활하는 등 정말 배고픈 나날이었다. 그 이후 자립을 위해 돼지, 염소도 키웠지만 어느 날 모두 도둑맞았습니다. 동네주민, 학생들이 쌀이나 반찬, 도시락도 돌아가며 갖다 주었다.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 교장선생님으로서 원하는 학교의 모습은?

 

▲ 반드시 특별하고 별난학교를 만들겠다.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진 자만이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있다.」는 교시, 교훈으로「예의바르고 능력있는 기술인」공교육에서는 안되는 틈새교육을 모범적으로 육성하겠다. 전국에 어렵고 힘든 청소년들이 우리 학교에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나쁜 습관이 바뀌고 바른 인격과 바른 인생으로 바뀌도록 학교답고 교육다운 기관으로 발전시키겠다.

 

▲ 졸업식 ©브레이크뉴스

 

- 학교를 설립하고,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면?


▲ 우리 모든 학생이 소중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장근기(동해자동차운전전문학원 부원장) 동해시테니스협회장 등으로 나이가 많은 시점에 입학하여 현재 성실한 삶을 살고 있어 뿌듯하며 김태순(부산택배사업)은 연초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와 세배도 받았고 전동영, 권기섭, 노금석, 박용구, 이억수 등 서울에서 착실하게 사업을 하며 자주 안부 전화가 온다. 누구 한명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겐 모든 학생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졸업후 남자들은 입대하고 휴가 나오면 꼭 학교에 찾아온다. 졸업생들의 결혼 주례를 위하여 전국적으로 다닌다.

 

- 학교설립 과정에서 가장 난관에 부딪었던 적이 있다면?

 

▲ 일반학교는 흑판이 있고 선생님이 있으면 되는데 전문계는 시설유지, 교양, 전문교사, 실험실습시설 등 복잡한 3중고를 겪는 고통을 수반해야 하고 행·재정 외부지원이 없는 악조건을 극복하는 정신적 의미와 신념이 중요했다. 재정적 고통은 하늘과 땅만이 아는 눈물겨운 세월이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다.

 

- 가족 중에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은?

 

▲ 부모님은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은행 직원이 되라고 하였지만 학창시절부터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운명이라 생각하고 서울 상경의 유혹도 포기하고 학교일에 몰두하였다. 아버지가 더 이상 막지 못하고 1교사 3칸을 지을 때 소 한 마리를 팔아주어 거금을 보태주시고 밤중에 아버지와 함께 동네 어른들과 벌목을 해와 힘들게 준공하였는데 그 건물을 볼 때면 아버지 모습이 기억난다.

나의 부인(김성자)은 학교 후배이면서 제가 학원강사로 잠시 있을 때 가르쳤던 인연으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어 결혼하였다.

 

부인은 현재 학교에서 가정과 상업수업을 하며 행정업무도 병행하며 서로 힘이 되어준다. 결혼식은 학교에서 천정이 없는 스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아주 간소하게 치르고 창고같은 임시 관사를 만들었으나 쥐떼들이 밤마다 전쟁을 하고 연탄가스와 함께 살면서 신혼생활의 재미는 생각할 수 없이 학교 운영에 일생을 바치며 지금까지 의지하며 살고있다.

 

- 학교에 특별한 동아리 조직이 있었는지?

 

▲ 학교의 관악대는 동해시의 모든 행사를 치러낼 정도로 대단한 자존심이었다. 어려운 학생들의 정서순화를 위해 아내를 설득해서 패물을 팔아 악기를 마련했는데 30년 가까이 운영하였으나 지금은 학생 감소로 운영되지 않고 있어 아쉽다.

적십자rcy, 망상라이온스클럽 학교레오클럽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학교 앞 마상천 700미터를 40년 동안 관리하고 정화한 끝에 물고기가 없던 곳에 지금은 물고기들이 사는 수생하천으로 깨끗하게 살려냈다.

 

-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대하여 한마디?


▲ 헌법상에도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법에 해당된 학교와 학생들만 혜택을 받고 평생교육법 학교는 모든 지원에서 제외되고 있어 교육의 불평등이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화되는 지름길은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전국 7만여 학교 밖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법적 혜택과 지원이 반드시 이루워지길 바란다.

정부 교육정책은 항상 공교육에만 두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숲은 못보고 나무만 보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 배움은 얼마나 하셨는지?


▲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이들어 둘째 아들과 예비고사를 함께 보고 96년도에 강원대 삼척캠퍼스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고려대 정책대학원 도시및지방행정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는 강원대 일반대학원(박사과정) 한 학기 남겨놓고 휴학 중이다.

 

-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 한국전쟁기간인 1950년 6월부터 3년의 기간은 사느냐 죽느냐하는 생사의 기로에 부모님은 3남매를 데리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다. 형과 누나는 굶고 병들어 죽고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마지막 숨이 붙어 있었는데 배가 고파 우니까 어느 계곡에 물이 고인 웅덩이의 물을 벌떡벌떡 먹더니 다행히 살아 억세게 살라고 이름을 ‘억’자를 붙여지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은 저녁밥을 해서 동생들을 먹이고 하루 종일 이집 저집으로 일을 다니다 돌아올 때 캄캄한 철길로 오다가 너무 피곤하고 지쳐 기차가 오는 것도 모르고 기적소리에 찰라의 순간에 뛰어나와 죽을 뻔했던 일은 정말 지금도 끔직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람들을 피해 주로 밤에 도벌을 했는데 나무 짐을 지고 산을 헤치고 내려오는데 아버지의 지게인지라 커서 나무에 걸려 곤두박질을 쳤는데 정신을 차려 일어나 보니 7~8미터 이상 되는 계곡으로 떨어져 2~3일 정도 의식이 없다가 깨어났다.

 

- 도전하는 것이 삶과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지?

 

▲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처럼 삶 자체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과 같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겠다는 굳은 각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해 왔다.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잇는 의지와 용기가 있기 때문에 어떤 도전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가난으로부터 해방이 삶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하면된다」라는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참 기술을 가진 사람은 굶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은 기술 밖에 살길이 없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 왔다.

 

- 왕성한 사회활동도 많으신데 그런 열정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 가난의 전초는 배우지 못한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함께 공유하면서 어두운 세상에 갇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개인, 단체 등 지역문제가 있는 어려운 일에는 본의든 타의든 앞장서게 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는 자진하여 봉사활동을 전개하고자 적십자, 라이온스클럽 및 동해경제인연합회, 강원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여 활동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게 꿈이다

 

- 앞으로 어떤 봉사를 하고 싶은지?


▲ 세상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직도 정부의 법적 보호도 미흡하고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많이 가진 분들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도층들이 책임있는 도덕적 양심과 역할은 물론 사회적 활동기구의 필요성도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청소년희망센터를 설립하고 싶다. 오고 갈 때 없는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공부하고 기술도 연마하고 장래 진로를 자기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하겠다.

도덕적으로 황폐화된 청소년세대 및 가정을 함께 복원 실현하기 위하여 지덕노체의 정신적 장·단기 훈련시설인 특수교육기관인 가칭 청소년교육원 설립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ngo단체 설립하고 싶다. 늘 생각하고 고민한 부분인데 경제와 관련된 지방상공인조직을 정부 부처와 협의하고 있는 중이며 반드시 성취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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