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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2-18

조회수39,191

제목

(도전한국인6) 87세에 경비행기 자격증 또 도전 '지익표'

87세에 경비행기 자격증 또 도전 '지익표'

<단독인터뷰>81세 초경량비행기자격증취득 700KM고향방문 성공인


“청소년들이여, 하늘을 날자. 높이높이 멀리멀리~”

지익표 변호사의 비행 목적이다. 푸른창공을 날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직한 생각이지만 실천으로 옮긴 사람은 많지 않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도 도전하여 쉽게 취득하기 어려운 pilot 자격을 취득한 분이 있다. 81세에 지익표 변호사는 초경량 비행기로 총 700km의 장거리 고향방문 왕복비행에 성공했다. 국내에서 초경량자격증을 소유한 600여 명 중 최고령으로,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권변호사 1세대로서 사할린 동포 실상을 처음 알리고,1992년 뜻있는 전국 변호사 200여 명을 규합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할린 동포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공식 제기하여 32억엔(약 320억원)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그가 도전하는 비행 목적은 미래에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갈 청소년들에게 넓은 마음과, 도전정신을 심어주는 귀감이 될 것이다. 소송업무를 하느라 바쁜가운데 서초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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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익표 ©브레이크뉴스

 

-비행기 조종에 대한 꿈은 언제부터?


▲어릴 적부터 늘 꿈은 꾸어 왔지만 실제로 배우기 시작한 건 2004년에 시작했다. 20시간 비행실습을 마치고 이론도 실기시험도 단번에 초경량비행기 자격에 합격했다.(약 1년 만에 2005년 5월) 그래서 81세 되던 2005년 11월에 직접 운전하여 고향방문을 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전남 고흥까지 700㎞를 단독으로 왕복 비행을 성공 하였다.

 

-장거리 비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비결은?


▲장거리비행에는 먼저 면밀한 사전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기상조건을 살펴 일차 목적지와 비상계획을 세우고 목적지의 좌표를 확인하여 거리와 소요시간, 충분한 연료확보, 기본항법을 수립하여야 한다는 점과, 사전에 당국에 법 소정의 비행계획승인신청서를 보내 승인을 받는 일과 이착륙시 마다 지정한 승인 부서에 보고하는 일, 또 비행 중에는 중앙방공통제소인 mcrc =master control and reporting center 와의 수시 교신으로 원만한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예정대로 첫 번째 장거리비행을 무사히 마쳤다.

 

-2005년에 초경량비행기로 이미 꿈꾸던 고향방문은 하셨고, 또 가고 싶은 곳은?


▲우리 어머니는 내 태몽으로 비행기 떼가 날아오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그 말씀이 항상 내 가슴 속에 박혀 있었고 또 나는 고향이 남쪽지방 청산도다. 사방이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이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좁고 갑갑한 곳에선 살지 못한다. 근데 내가 살아온 과정을 보니까 그런 내 성품과 맞지 않게 너무 좁게 살았다. 그래서 항상 넓은 마음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전하는 시도 썼다. 할아버지마음으로. 제목은 <나는 청산도 사람> 사실 헬리콥터를 배우고 싶었다. 헬리콥터는 비행장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해서 어느 곳에나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6개월 이상 교육을 받아야하고 교육기관도 우리나라엔 없고 해외에 있기 때문에 현직 변호사인 나로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초경량비행기를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늦기 전에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도전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경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그건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어디든 갈 수가 있다. 세계일주도 할 수 있다. 사실 세계일주가 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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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익표 ©브레이크뉴스

 

-같이 비행을 즐기는 동료가 있으신가?


▲갈 때는 나 혼자 몰래가니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냥 연습하러 갔을 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도 꽤 있더라. 개인적인 친분 있는 사람은 없고 배울 때에도 내가 스스로 찾아서 가서 배운 거다. 초경량비행기는 두 사람 밖에 못 탄다. 그래서 장거리 비행을 할 때는 반드시 교관을 같이 태우고 간다.

 

-경비행기 자격증에 또 도전하는 이유는?


초경량비행기는 2인 까지 밖에 탑승 할 수가 없고 국내에서만 다닐 수 있다.그러나 경량비행기는 3인 이상 탑승 할 수 있으며 해외 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로 경비행기

자격취득을 위하여 신체검사는 무사히 통과 되었다. 가까운 곳에 수강신청을 해 놓은 상태 이다. 초경량비행기 자격증도 알리지 않고 취득 하였는데, 가족들이 반대한다. 하지만 이해 해 주리라 믿는다.

 

-창공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3000미터 높이로 뜨면 모든 산야가 다 내 발아래 있다. 구름밭을 달리고 있으면 산맥도 국경도 없다. 전라도 경상도를 가르는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초월한 자유의 정신, 호연지기랄까.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이런 정신을 길러주고 싶은 거다. 나는 기독교의 장로이지만 요즘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대신에 기독교회의 신앙개혁운동을 벌이고 있다. 교인들이 좁은 사고방식에 빠져서 남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교리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작은 산맥하나를 가리키며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인 봉우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세상엔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 하늘위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모든 종교는 절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내가 늦게 서야 깨달았다. 자유보다 훌륭한 가치가 없다. 나는 마음에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느님께 늘 감사할 뿐이다.

 

-비행기가 주는 매력은 무엇인지?


▲초경량비행기는 500피트 내에서만 하게 되어있어서 조금만 바람 불거나 안개 끼면 위험해서 타지 못한다. 사실 비행기가 내게는 너무 작다. 작은 꼬마 같다. 그러면서도 사랑스럽다. 작년에 한서대학에 들어가서 경량비행기를 배우려고 했는데 집에서 아이들이 알게 되어서. 가족들이 너무 걱정을 하니까 일단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신체검사도 시력 외에는 다 통과 했는데. 경비행기 몰고 일본에도 가고 싶고 한데.. 항공기 동호인들이 있는데 내가 언제 간다고 기별을 하면 모두들 나와서 대환영을 해준다.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래서 지금도 항공사전, 항공이론 책을 항상 나와 가까이 두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한다. 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지치지 않고 도전한다는 게 행복하다. 내가 아흔 살이 되어도 도전은 이어질 것이다.

 

-법조인으로서 지익표 변호사의 신념은?


▲최근에 내가 도전한 내용과 법률가로서 20년 동안 한 일(사할린문제, 한일관계), 소신 등이 전국 법조인들이 다 보는 신문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대한변협신문 - 3만부) 나는 추석선물도 한 번 받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뇌물은 아닐지라도 일단 받고나면 나중에 혹시 그 사람과 관련된 사건이 있을 때 내 마음이 동할 것 아닌가. 만약 판사라면 순수한 입장에서 재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로 좋은 머리로 공부해서 돈을 벌기위해서 법정에 서면 안 된다. 인권을 수호하는 본래의 사명을 다 할 때 돈이 따라오는 것이다. 나는 돈을 위해 변호사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보다 못살지도 않았다. 젊은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 지익표 ©브레이크뉴스

 

-인권변호사 1세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시다. 그 동안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5.18 전부터 내가 전라남도에 있었던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들 관련 된 재판에서 무료변호를 했고 또 교육헌장에 관해서도 비난을 해서 군정에 구속된 적도 있었다. 그 후로 민족봉사를 시작했다. 사할린 문제, 일제치하 노무자 정신대 문제 등등을 1989년부터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권변호사’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모든 변호사는 당연히 인권을 수호할 의무가 있으니까. 국제 변호사라는 말은 많이 한다. 국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예를 들어 정신대문제로 일본 법정에 가서는 소장도 모두 일본말로 작성해야하고 모든 일을 다 일본어로 해야 하는데 그걸 일본어를 모르는 변호사가 할 수는 없다. 번역을 아무리 잘 해도 뉘앙스 차이가 있으니까. (책상 위에 두꺼운 서류뭉치가 한 가득 쌓여있는데) 이것도 다 내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직접 작성한 거다. 법조계에서 컴퓨터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나와 동기인 윤종수 변호사, 이렇게 두 사람이다. 컴퓨터로 워드작업도 다 직접 할 수 있으니까 이 일들을 다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 사실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이걸로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일본에도 도와주는 변호사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서도 후배 변호사들이 많은 협력을 해 준다. 그런데 나는 우리 민족이 고통 받았던 그 역사적인 내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니까...이런 나에게 이렇게 봉사할 마음을 주셨고 기회와 능력을 주셨다는 것에 늘 신앙적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내 신조 중에 하나가 변호사들은 반드시 자기 돈을 들여서 봉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더라도 재판에서 질 수도 있다.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내 지식이 부족해서, 주장을 잘못해서, 입증을 잘 못해서 의뢰인에게 손해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무엇으로 보상을 하나? 내가 일찍부터 그걸 깨닫고...봉사 이외에는 그를 속죄를 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후배 변호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게 있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최근에 진행한 일본국가 상대로 낸 소송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달라고 요청하였다. 국제법상 국가가 개인들을 위해서 나설 의무가 있다. 그것이 외교적 보호권 행사다. 국민을 위해서 국가가 나설 의무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국 상대로 우리가 받아내지 못한 보상을 국가가 대신 받아낼 의무가 있다. 국가가 국가를 상대로. 그래서 최근에 성명서와 청원서를 4월 20일 대표들과 가서 외교부장관에게 시행해달라고 전달하고 왔다. 만약에 시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해서 불이행에 대한 손해를 청구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이게 내 마무리라는 생각이다. 내 나이도 있고(올해로 87세) 하니까 이제는 내 할 일은 이 정도 이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는 꼭 이어서 잘 해달라고 장철우(50대) 같은 후배 변호사들에게 잘 부탁을 해 두었다.

 

-독학으로 사시에 합격하셨다고 들었는데, 변호사는 언제부터 하셨는가?


▲1957년 사시에 합격 하여 변호사는 1966년 광주에서 인권변호사로 시작 했으며 서울에서는 1987년부터 지금까지 서초동에서 하고 있다.

옛날에 보통학교 나왔는데 집안에 재정문제로 중학교를 못 갈 처지였다. 그런데 우리어머니가 중학교를 꼭 가라고 하셔서 중학교까지는 나왔다. 그리고 어느 카달로그에서 보통문관시험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걸 준비했다. 그 시험만 통과하면 재판소서기를 할 수 있었다. 군이면 군청에서 과장급이었다. 시험내용은 주로 법률공부였는데 그 공부를 쭉 했다. 중학교 5년제 중 3학년 재학 중(18세)에 한 번 시험을 봤다가 낙방했다. 그런데 일제말 전쟁통에 고등문관시험이 폐지되어버렸다. 고등문관시험만 통과하면 검사도 판사도 될 수 있다는 게 젊은 시절 나의 희망이었는데 그게 없어지다 보니 그냥 보통문관시험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학교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가면 내가 학교 교장을 할 수 있겠지만 좁게 세상을 살기는 싫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1951년에 4월달부터는 마음을 정하고 다시 옛날에 하던 법률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 고등고시 4회에 예비고시(대학 미졸자를 위한 시험)를 합격하고, 8회에 필기고시 합격, 9회 때 구술고시를 합격해서 33살에 합격을 한 거다.

 

-역사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장군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사람들은 이 대통령 두 분을 두고 비난하기도 한다. 물론 그 분들이 인간적으로 잘못한 점이 있지만, 나는 그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안다. 특히 우리 스스로 초대 대통령을 부정하면 나라의 성립자체를 부정하는 꼴이다. 조지 워싱턴이 다 잘한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짧은 역사 속에서도 미국이 초대 대통령을 숭상하는 정신은 높이 사야한다. 박대통령의 군사쿠데타도 법률가로서 어떻게 그걸 잘 했다고 하겠는가. 쿠데타를 일으킨 그 분은 잘못을 했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멀리 내다보고 기간산업을 육성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대로 잘 한 것은 잘 한 것대로 기록하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역사를 관통하는 시선이 없이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


▲자녀는 4녀 1남, 손자가 5명이다. 내 형제는 6녀 1남이다. 위로 누이 둘에 아래로는 여동생 넷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많은 누이들을 위해서 내 한 몸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누이와 동생들 학비를 보태주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서 다들 잘 살고 있다. 그래서 다들 자기들 남편보다 ‘우리동생’, ‘우리오빠’ 이런다. (하하하) 느즈막히 변호사를 시작해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감사한다.

 

-어떻게 건강을 유지 하는가?


▲고혈압, 당뇨 없이 아주 건강 한 상태이다. 매일 아침 묵상 하며, 맨손체조를 1시간 씩 꾸준히 해 오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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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익표 ©브레이크뉴스

 

-도전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지금 내가 몇 살이든, 늦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언제나 영원한 앞날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나는 기쁨을 느낀다. 살아있든 죽든 여기도 거기(사후세계)도 모양만 다를 뿐 다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이다. 젊은 사람들도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새 마음으로 도전하길 바란다.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오늘에 감사 하며 넓은 마음,높은 마음,그리고 도전의 정신으로 승리 하자” 이다.

 

-자작시 ‘나는 청산도 사람’에 대해 소개해달라


▲사실 4녀 1남 가운데 아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 그 아들을 생각 하며, 나의 소년 시절을 생각 하며 시를 써 놓은 것이 있다. “나는 靑山島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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