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20대 청춘들이 많아졌다. 처음 보는 길에 쉽사리 발을 내밀지 못하고, 뒷걸음치기 바쁘다. 그런데 이 청년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만 고집하고 있다.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생활을 하며 깨달은 자신의 진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한양 사이버대학교 청소년학과로 편입한 23살 청년 황래영 학생. 그는 청소년 진로캠프를 기획하고 청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청소년 지도사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강연을 하면서 만난 청소년만 350명이 넘고, 여전히 청소년들의 꿈을 응원하기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고등학교 때의 아픔을 극복하고, 그는 비슷한 아픔을 가진 청소년들을 만나며 달래주는 멋있는 청년이 되었다. 개그맨 못지않은 넘치는 개그 끼와 현란한 말솜씨를 가진 그를 만나보았다.
황래영 학생/도전한국인본부
▲ 자기소개 부탁.
저는 사람 냄새나는 감성적인 글을 쓰는 23살 시골청년 황래영이라고 합니다.
▲ 지금까지 했던 대외활동 또는 했던 일들이 무엇이 있는지?
저는 원래 기자 쪽으로 활동을 하다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멘토링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 마포 청소년 수련관에서는 진로 스토리텔러라고 해서 서울에 있는 중, 고등학교에 직접 강연을 나가면서 아이들 진로코칭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수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1대1 멘토링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학습과 문화생활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심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커리어 디스커버리라는 회사에서 대학생 연구원 인턴 있는 건데요. 그 회사에서 아이들 진로캠프 돕기를 하면서 힐링콘서트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 많은 일들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발로 뛰면서 찾아다녔어요.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 멘토링이라는 것이 흔치 않아서 종이가 필요하면 교무실에 있는 이면지를 가져와 그림을 그렸고, 큰 미술대회를 나가야 하는데 도구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담당 선생님이 미술전공을 하셨다 들어서 그 선생님에게 색연필을 빌려 대회도 나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도 제가 직접 선생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많이 요청했고, 그 때마다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러다 문득 ‘학생들이 원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청소년 친구들 옆에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멘토링이라는 단어를 대학교에 올라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아이들 멘토링을 시작하게 됐는데 어렵더라고요.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지도 않고 사고도 많이 쳤는데 후회가 좀 되었어요. ‘내가 이걸 왜 했지? 그냥 관둘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아이들 모습이 바뀌더라고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어린 학생이 중학교 올라가서 연락이 오고, 고등학생이었던 친구들이 군대 가서 훈련 나가거나 휴가 나올 때쯤에 항상 먼저 연락이 오니까 보람을 느꼈어요. 아이들한테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사람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원했는데 이제 내가 어느 정도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
잠깐 18살 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은데 저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조금 하이 톤이에요. 저희 집이 군 집안인데 초등학교 5학년 때 까지 군인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었거든요. 그 당시에 군인아파트 같은 경우 굉장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남자답게 뛰어다니면서 놀아야하고, 목소리나 체격 같은 것도 여자아이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게 있었어요. 근데 저 같은 경우 7,8살 때도 목소리 변화가 별로 없었고, 여자아이들과 비슷했거든요.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군인가족내의 형들도 놀렸고, 어른들도 이상하게 바라보셨죠. 그 정도까지는 괜찮다 싶었는데 중학교 올라가니까 놀림의 단계가 심해져 트랜스젠더 아니냐고 묻는 친구들,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전 이렇게 태어났고, 남들한테 피해줄 것도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자 생각했어요. 그러다 열심히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지금 전공은 신문방송학과지만 고등학교 때는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를 예산 지원 받아서 그림 그릴 수 있었으니까 정말 좋았어요. 물론 힘든 점도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추가합격해서 갔는데 기숙사 자리가 없어서 16살에 자취방을 구하러 다니는 경험을 했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를 무너지게끔 한 사건이 일어났죠.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저를 잠깐 부르셨다. 교장선생님이 예술계인 저희학교를 위해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도와달라고 하셔서 흔쾌히 좋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죠. 예를 들어서 보통 교무실에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가면 서서 인사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전 열심히 작업 물을 만들고 교장선생님께 보고를 드리러 갔는데 교장선생님이 자기 허벅지에 앉아서 보고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군인집안이라 그런 구분도 확실하게 있었고,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남자 교장선생님이었어요. 제가 잘못들은 거냐고 물으니까 일단 앉으래요. 그래서 앉긴 앉았어요. 한 손으로 저를 안고 모니터로 계속 일을 하셨다. 그리고 제가 그 때 굉장히 왜소했고, 몸도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교장선생님이 왜 이렇게 피곤해보이냐면서 안마를 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안마를 하는 손이 점점 밑으로 가서 하체까지 내려갔어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아무 말도 못하였다.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얘기도 못했고요. 이것 뿐만 아니라 더 심한 일도 많았는데 그 후에 다행히도 담임선생님이 눈치를 채셔서 저를 부르셨는데 얘기를 나누다가 담임선생님이 미안하다고 우셨어요. 그 뒤로 학부모님들도 알게 되었고, 교장선생님도 모든 사람 앞에서 공식사과를 하고 강제 사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사건이 저를 가장 힘들고, 약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 그 어려웠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
그 사건이 있은 후의 문제는 저는 더 이상 뭔가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림 그리는 것도 싫고, 학교 자체에 있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강원도에서 잠깐 쉬게 됐는데 뭔가 억울한 거예요. 왜 하필 그런 일을 당 한 게 나인지. 나와 같은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하필 나였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루는 답답해서 TV를 틀었는데 저랑 비슷한 상황을 겪은 친구가 나오더라고요. 저 친구도 분명 나처럼 죽고 싶은 생각이 들 텐데 뭐가 저 아이를 위로를 해줬을까. 그러다 문득 글을 한번 써볼까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림은 당장 손에 잡히지를 안했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리는 재주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요. 그 뒤로 본격적으로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밑바닥에서 올라올 생각을 안했었어요. 내가 이렇게 누워있을 동안에도 어떤 청소년들은 아파하고 있으니까요. 그 친구들을 위해 일어나야 하는 게 나라면 어떨까라고 생각했고 그 뒤로 하나하나 쌓아 올라갔어요. 그리고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신기하기도 해요. 18살 때 ‘언제 죽지’라고 생각했던 저였는데 지금은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 너무 행복하죠. 그래서 전 하루하루가 도전이에요.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도전이고, 여러 가지를 기획하는 것도 도전이고, 18살 때 끝났으면 못했을 새로운 도전이 있으니까 이제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운 것 같아요.
▲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
21살 때 중학교3학년 학생들과 2박3일 동안 캠프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캠프참여의사가 전혀 없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질문이 ‘왜 남자선생님이에요? 여자 선생님으로 바꿔주세요.’ 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계속 스마트폰만 만졌고, 주로 하는 질문이 ‘화장실 몇 개 있어요? 침대 몇 개 있어요? 밥 어때요?' 이니까 당황스러웠죠. 아이들이 전혀 따라오지를 않으니까 괜히 왔나 싶었습니다. 21살에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캠프를 하러 왔는지 후회스럽더라고요. 그런데 그 날 저녁 8시에 토크쇼를 했어요. 강의실 불을 다 끄고 강의실 가운데에 촛불 하나 두고, 대학생 선생님한테 할 말이 있는 친구들은 그 촛불을 들고 가 얘기를 하는 토크쇼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자기가 촛불을 들고 가려고 하는 겁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까 아픈 사연이 많았어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친구, 아빠가 실직한 친구도 있었고, 한 아이 같은 경우는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려고 했는데 집에 동생이 많아서 예술계 고등학교를 못 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얘기를 다 듣고 제 얘기를 조금 해줬던 것 같아요. 나는 중학교 때는 솔직히 공부를 잘 하지 못했고, 고등학교 때 사건, 사건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지금 난 너희들 앞에 있지 않느냐. 우리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다 이루어져 있고, 한편의 드라마 같다. 너희들의 이야기를 기, 승에서 끝내지 마라.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토크쇼가 끝났고, 캠프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열심히 수업 들었는데 11월 달에 한 친구가 연락이 왔어요. 매일 수학 3,40점 받았는데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수학 80점 받았다고 밤 11시에 전화가 온 거에요. 너무 좋았는데 티는 못내고, 괜히 틱틱거리면서 대답했던 것 같아요.(웃음)
이 일이 기억에 남는 이유가 2박 3일이 굉장히 짧은 캠프인데 저를 기억해주고, 이렇게 연락을 해준 게 너무 신기해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도 활력소에요. 그 아이들이 지금도 연락을 해주니까요.
▲ 인생의 멘토나 존경하는 사람은 누가 있나?
저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같은 경우 19살 졸업하기 전에 대구대학교 특수 교육과를 가고 싶으셨대요. 어머니가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도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도 전에 수원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셨어요. 그러다 저희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셨고, 마흔 정도에 저한테 청소년 지도 쪽으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죠. 어머니가 시력도 점점 떨어지고, 몸도 건강하신 분이 아닌데 4년을 버틸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많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대학 하나 때문에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학비를 아버지 월급으로 내지 않고, 낮에는 초등학교 화장실 청소를 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셨어요. 그리고 운전도 배우셔서 작은 중고차 한 대 사셔서 춘천 왔다 갔다 하시면서 대학교에서 시험도 치고, 장학금도 받으셨어요. 마지막 졸업논문도 무사히 통과하고, 청소년 지도사 면접 자격도 합격하셔서 2급 자격증도 따셨어요. 4남매 키우면서 힘드셨을 텐데 19살 때 하고 싶으셨던 걸 44살 이루신거죠. 저는 급한 성향이 있어서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힘들어 할 때, 어머니가 많은 조언도 해주셨어요. 다시 고등학교 때의 일을 조금 얘기하자면 그 사건이 있은 후 2주 뒤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게 되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재미있으시지만 엄격할 땐 엄청 엄격하세요. 그런데 어머니가 무슨 자신감으로 그 아픔을 혼자 안고 있었냐. 가족이 없냐. 부모가 없냐.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을 텐데 네가 무슨 큰 그릇이라고 혼자 그걸 안고 있으려고 했느냐. 그러시면서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머니 앞에서 펑펑 울었던 것 같아요. 많이 무서웠다고 얘기하면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울지 않았는데 부모님 앞에서 다 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한테는 항상 고마워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세요. 멘토는 함께 하는 거고, 멘티가 힘들다 싶으면 은 뒤에서 밀어줄 수도 있고, 가끔 앞에서 손짓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멘토라고. 매일 그런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이들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8,9월 달에도 강연이 있고, 제가 하는 일이 아이들 진로 쪽이라서 진로 캠프도 기획을 하고 있는데 저랑 뜻이 맞는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무대도 만들어주고, 대학생들을 통해서 바뀌는 아이들을 보면 소중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나는 하루라도 행복하면 안 되나?’라는 고민이 진짜 컸는데 요즘 아이들 앞에 서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나보다 더 많이 아프거나 나처럼 아픈 친구들을 안아주기 위해 내가 그동안 아팠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한테 소중한 것은 아이들 앞에 서는 순간이에요.
▲ 앞으로의 꿈은?
저는 편입 준비를 하고 있어요. 지금 다니는 4년제 대학을 그만두고, 사이버 대학을 다니면서 청소년 지도사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처럼요.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된 걸 해보고 싶어서 청소년 지도사로서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이 나오면 제가 겪었던 아픔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자리와 나아가서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제가 만날 수 있는 청소년들도 많고, 지금도 꾸준히 만나고 있지만 제가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잖아요. 제가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가 쓰는 글이나 가끔씩 그리는 그림만으로 아이들이 편안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파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끝자리에 있는 친구가 자고 있어서 그 친구를 발표 시키려고 했는데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선생님. 저 공부 못하는데요.’라고 말하더라고요. 나도 공부못한다고 하면서 그냥 발표 시켰어요.(웃음) 이것처럼 10대 친구들은 기승전결에서 기,승만 하고 끝날 때가 많아요.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그 시간을 짧게 한정지으려고 하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시간을 한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작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질문이 오기도 전에 공부못한다고 답을 막아버리는걸 보면 많이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지금 주어진 기승전결의 구도가 베드엔딩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드라마를 한편만 보지는 않잖아요. 새로운 드라마가 또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새로운 드라마가 나올 것이고, 정말 가끔씩은 지루한 엔딩도 있을 거예요. 다음에는 원하던 드라마의 결말인 해피엔딩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그 해피엔딩의 주인공까지 가면 좋겠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 승에서 끝나지 않고 기승전결까지 다 보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 :한양 사이버대학교 청소년학과 황래영 학생
인터뷰어 : 도전한국인 대학생 서포터즈 이주희<darl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