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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2-18

조회수40,782

제목

(도전한국인12) 서울 지하철 詩를모아 시집낸 민윤식 시인

서울 지하철 詩를모아 시집낸 민윤식 시인

<단독 인터뷰>우리나라 최다 잡지창간 경력가진 편집자계 신화인물


서울 지하철 역 300개를 발로 뛰며 시집을 낸 민윤식 시인(65세). 우리나라 최다 잡지 창간 경력을 가진 민윤식씨는 편집자계의 신화다. 레이디경향과 우먼센스 등 유명한 여성잡지의 창간 편집장이었다. 남다른 감각과 이슈 선점 능력으로 국내 여성지와 사보계의 마이더스 손이라 불리던 그가 독립하여 처음 만든 주부잡지 ‘마리안느’로 18억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부도 충격으로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18만부가 팔린 NBA화보집 과 스포츠 잡지 ‘루키’의 성공으로 기사회생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듣고 나니 천생 편집인인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하던 어느 날,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을 읽고 충격을 받아 시를 접고 대신 편집자로서의 인생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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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윤식 시인 ©브레이크뉴스

 

한동안 시를 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지하철 스크린 도어의 시를 보면서 시에 대한 불꽃을 다시 지폈다. 서울시와 수도권 전철 300개 역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서민형 생활시를 모아 일명 ‘지하철시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불굴의 한국인으로 살고있는 민윤식씨의 다모작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울 시내 지하철을 직접 다니며 스크린도어의 시를 수집하셨다고?


▲서울시와 수도권 전철을 포함하여 총 489개 지하철역이 있는데, 서울시 경계를 벗어난 역에서는 거의 스크린도어 시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직접 발품을 판 역은 총 300여 개 정도다. 한 편씩 공부하는 마음으로 스크린 도어의 시를 직접 읽으며 촬영을 했다.

 

-어떤 계기로 도전을 하였는지?


▲처음부터 책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시들을 수집한 것은 아니다. 지하철을 매일 이용하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러다 한 번은 읽게 되었는데, 안명옥 시인의 ‘상처’(3호선 고속터미널역 스크린도어)라는 시였는데, ‘아! 여기에 이렇게 좋은 시가 있구나.’ 그 때부터 스크린 도어의 시들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역에 가면 그 곳의 시를 주욱 훑어보게 되었다.

난 시인이면서 이십 년이 넘도록 어느 잡지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좋은 시를 읽으니 좋은 시를 다시 쓰고 싶다는 자극이 되었다. 스크린 도어에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팍팍한 삶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시가 어울린다고 느꼈다. 시집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훨씬 나중에 일이지만 시를 선별한 기준은 그 때의 생각과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을 하였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


▲개인적인 공부로 시작했기에 처음엔 그저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블로그에 몇 편씩 올렸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시집을 내야겠다고 생각한건 김지태의 ‘아내의 밥상’(3호선 구파발역 스크린도어)이라는 시를 읽고부터다. 작년(2010년) 10월경부터 마음먹고 각 호선별로 촬영을 시작해 한 달 반쯤 걸렸는데, 다른 일 없이 매일 이것만 했다면 한 달 안으로 다 끝냈을 거다. 주 5회 낮엔 근무하고 오후 5시 또는 7시부터 사무실에서 나와 주로 야간작업을 한 후 막차를 타고 집에 갔다. 하루에 최소 5개 최대 10개 역을 찍었다.

 

-많은 시 가운데서 어떻게 선별을 하였는지?


▲총 2,000편 이상의 시를 찍은 후에 시집에 들어갈 시를 선별하는 작업이 중요했다. 선정 기준은 ①‘이웃과 사회에 대한 긍정의 눈’을 가진 시 ②‘시대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은 작품 ③‘자연 속의 미물에 대한 소중함’을 묘사한 시 로 정했다.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서 2차에 걸친 ‘시독회’를 열었다. 1차는 현재 운영 중인 인터넷 카페의 회원 10여명이 참여해서 ‘시집에 수록하면 좋은 시’로 500편을 가려냈고 2차 시독회는 현역시인, 방송작가, 언론종사자 등 전문가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중앙대학교 정오문학회 회원 7명이 모여 난상토론 끝에 200편을 추렸다.

 

시집을 내려면 행정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관련 문인단체에 연락해 작가들의 연락처를 확인하고 우편과 이메일을 통해 작품 수록동의서를 받았다. 안타까운 점은 꼭 수록하고 싶은 시인데도 연락이 닿지 않아 싣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책이 1권 ‘희망의 레시피’, 2권 ‘사랑의 레시피’ 그리고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행복의 레시피’다. 각 권당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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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윤식 시인. ©브레이크뉴스

 

-지하철 시집을 내는데 주변의 반응은 어떠했나?


▲두 가지였다. 지하철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찍고 고르고 엮어서 책으로 내는 건 참 대단한 일이지만 시집이 과연 팔릴까 하는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과를 놓고 냉정히 평가를 해보면 분명 좋은 아이디어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멋있는 CF이지만 실제로 물건을 팔아주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은 일단 유명한 작가나 이름 있는 출판사이니까 예를 들어 정호승, 류시화 같은 유명시인들의 시가 실렸더라면 더 팔렸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을 싣지 않은 이유는 지금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이 그들의 시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대가들의 시는 대부분 현재의 감각과 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거나 기획 컨셉과 맞지 않아서 뺄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신데 등단은 언제 하셨나?


▲내가 67년 대학교 2학년 때 당시 문화공보부 문학 신인상에 시 부문으로 당선되었으며 3학년 올라가면서 ‘시문학’이라는 잡지에 추천받아 등단했다. 74년에는 첫 시집 「유민」을 냈다. 70년대 중 후반까지 주로 창작과 비평에 4~5회 작품을 발표했다. 주로 역사적인 인물 -전봉준, 김시습, 만적 등-을 소재로 한 체제 저항시를 쓰다가 절필을 하게 된 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나서부터다. 나의 시는 노동자에 대한 시였지만 노동자가 읽을 수 없는 현학적인 시였다. 박노해의 작품은 노동자의 일상을 그대로 써내려간 그들을 위한 시였다. 그 때부터 나는 시인으로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철저히 편집자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많은 직업 중에 왜 편집자를 선택했는가?


▲대학생 시절에,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창간 발행인인 월레스의 이야기를 읽었다. 미국 건국 초기에 스페인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다리를 다친 그는 병원에서 온 종일 책을 읽었다. 퇴원 후에 고향에 돌아가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세상에 돈 없고 시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읽었던 좋은 책을 읽히고 싶어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소규모 프린트 형태로 시작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제 전 세계 1440만 명이 넘는 독자를 자랑하게 되었다.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부터 대학교수까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용기와 유머를 핵심 주제로 담고 있다. 나는 월레스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편집장으로서 커리어의 출발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셨나?


▲출판사 동서문화사에서 일했을 때는 <대망>이라는 책의 기획에 참여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평생을 다룬 소설인데 12권짜리 전집이었는데 적어도 1억 부 이상은 팔렸다. 잡지사에 스카웃되면서 ‘주부생활’ 등의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극과 극이어서 사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처럼 살라고 할 자신은 없다. 출판사에서 잡지사로, 두산그룹 홍보실로, 경향신문사로. 메트로신문 편집국장으로 일했고 신문사를 나와서는 창업을 했다. 이 역시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다. 현재는 일인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곧 일인잡지를 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

 

▲ 민윤식 시인 ©브레이크뉴스

 

-편집자 민윤식의 잡지는 다른 잡지와 어떻게 달랐나?


▲경향신문에서는 여성지 레이디경향 창간 편집장으로 일했다. 레이디경향은 여성지에 센세이셔널리즘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주간지 성격을 띤 여성잡지인데,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책이 월간지와 경쟁을 하려면 빠른 판매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 특종, 토픽 등 임팩트가 강한 소재를 발굴해 싣기 시작했다. ‘결혼설’, ‘격정토로’ 등의 문구는 내가 쓰기 시작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지들 제목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디자인 면에서도 편집부에 예속되어 있던 디자인파트를 독립시켜 더 비주얼적인 측면을 강화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당시로서는 무척 혁신적이었다. 여성잡지가 3쇄, 4쇄를 찍는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미스코리아 진 호스티스 진상”이라는 기사가 특종으로 실렸을 때는 10만 부가 하루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신문사 사장이 바뀌면서 안티그룹들의 말에 부국장 대우 겸 편집위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6년 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라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성격상 거기서 가만히 쉬지를 못하고 서울문화사로 옮겨 ‘우먼센스’를 창간했다. 그 때에는 “조용필 이혼”이 이슈였다. 다른 여성지에서는 “조용필은 음악과 결혼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실을 때, 우리는 극비로 “박지숙(당시 조용필의 아내)이 말하는 조용필과의 결혼생활”이라는 제목의 수기를 준비했다. 여자 입장에선 어떤 걸 보겠는가?

 

-사보 편집자로서는 어떤 일을 했나?


▲현장직의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의 글을 많이 실었다. 화보도 중역들의 딱딱한 사진이 아닌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회장님 신년사 같은 건 넣지 않기로 했다. 당시 두산그룹 기획실장 박용성씨(현 대한체육회장)와 독대하여 기획안을 결제 받았다. 당시 나는 주부생활사에서 차장으로 있다가 두산그룹 기획실 홍보팀 차장으로 스카웃되어 갔었다. 첫 출근해서 사보 제작에 대한 지침을 내려달라고 했더니 그냥 소신껏 알아서 하라며 박용성 실장은 “임원들 사진이 나오지 않게 하라”고 딱 한 마디를 하더라. 그렇게 만든 사보가 1년에 한 번 있는 사보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탔다. 그 때 내가 만든 사보가 뜨면서 같이 유명해진 필자가 얼마 전에 베스트셀러 <흥하는 말씨 망하는 말투>를 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상헌 선생이다.

 

▲ 지하철 시집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마리안느’라는 잡지가 부도났을 때다. 14개월 운영하고 발행한 어음을 막지 못해 결국 부도가 났다. 마리안느는 3無의 잡지를 표방했는데 그게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

부도를 처음 맞았을 때는 정말 감당이 안 되었다. 죽으려고 수면제를 가지고 굉장히 추운 12월 어느 날 미사리 강변으로 갔는데, 막상 죽으려니까 죽는 것도 쉽지 않더라. 죽으려면 왜 죽는다고 몇 자라도 써놓고 죽어야 할 거 아닌가. 할 말은 많았는데. 아내에게도 뭐라고 써 놓고 가야 하는데...그게 그렇게 안 써지더라. 이미 만취한 상태였는데, 눈물 때문에 사인펜은 계속 번지고. 그러다가 머릿속에서 이런 말이 들리더라. ‘너 결국 이렇게 죽으려고 이 지랄을 하면서 살았냐’ 또 ‘정말 이 길 아니면 안 될 정도로 이판사판 다 해본 거냐’... 그리고 나니 좀 정신이 들더라.

 

-잡지를 하다가 망했는데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잡지 때문이었다고?


▲‘루키’라는 스포츠 잡지 덕분이었다. 누가 웨딩잡지를 창간한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고액의 월급을 받고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일로 어느 날 일본에 출장을 갔는데 기노쿠니야라는 대형서점에서 까까머리 일본학생들이 특정 잡지를 많이들 사가는 것이었다. 자료 삼아 몇 개 샀는데 NBA 농구스타들이 나오는 화보집이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도 대학농구연맹전으로 농구 붐이 일고 있었던 시절이다. 말하자면 일본 NBA잡지를 흉내내 만들어 팔아보았는데 이게 총판에 배본된 첫날부터 난리가 났다. 그 농구잡지 하나만 20만부 정도 팔았다. 잃어버렸던 돈을 다시 벌고 재기의 시작이 된 것이다.

 

-앞으로 또 도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지하철 시집을 내고 나서 여러 가지 관련된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추진했던 일 중에 ‘시전(詩展)’과 투어가 있다. 책에 작품이 실린 시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자신의 시가 어느 역에 붙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방에 계신 작가들을 초청하여 투어를 할까도 생각했었다. 시전은 경복궁역의 전시공간을 빌려 타이포그래피의 멋을 살려 시 자체로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획해 준비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요일별로 작가들을 초청해 싸인회도 열고 시집도 판매해서 전시회경비를 충당하려 한다. 그 외에도 내가 소속된 문학동인들끼리 시와 수필 소설까지 전시하는 최초의 ‘문학전’을 열고 싶은 바람도 있다.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


▲인생은 다모작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신문사라는, 철저한 SKY대학 위주의 학벌 세계에서 동문도 인맥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화려한 경력도 없이 여성지 창간의 모험을 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와 신선한 감각이다. 그래서 내가 당시 직원을 뽑을 때도 일부러 경력직원보다는 1~2년 정도 사회경험을 한 다양한 대학 출신들을 택했다. 머리가 굳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가 수월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깨고 그들과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부잡지 ‘마리안느’도 부도가 나긴 했지만 내게는 역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한 단계 한 단계 인생을 살아가며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다. 그러나 실패는 끝이 아니다. 다음 단계의 인생을 잘 꾸려가기 위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것이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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