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2일 제24회 노인의 날에 즈음한 단상
<다시보고싶은 기사>1968년에 노인의 날 만든 이돈희 선생이 2006년에 쓴 특별기고
2013년과 2017년에 주승용 국회의원이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 발의했고, 올해 9월8일에는 국민의 힘 하영제 국회의원이 공휴일 지정을 발의했다.
국회에서 몇차례에 걸처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발의는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런가운데 고등학생때부터 노인의 날 기념일을 만들어 행사를 주관하고
결국 국가에서 노인의 날을 제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분이 바로 이돈희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 당시부터 노인의 날의 공휴일 지정을 수십 차례 제안하기도 하였다.
올해 10월 2일을 노인의 날을 앞두고(올해는 추석연휴와 겹치는 관계로) 9월 25일에 노인의 날 행사를 한다.
이돈희 선생은 2006년에도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십시오!>라고 글을 기고했다.
노인문제연구와 노인존경에 대한 선구자적인 분이다. 하지만 기존 노인회 단체에서는 선거제와 정부 지원단체 등으로 인하여 선구자 이돈희 선생을 비주류로 여겨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2021년은 그가 노인의 날을 만든지 53주년, 제 1회 노인의 날 행사한지 50주년, 국가에서 제정한 노인의 날 24주년 되는 해이다. 노인회 단체는 지금부터라도 이돈희 선생의 거룩한 정신을 존중하고, 공식행사에 고문 등 격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 정리: 조영관 발행인· 도전한국인본부 대표〉
하영제 의원(사천·남해·하동)은 8일 국경일과 국가의 중요한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노인의 날(10월 2일)을 공휴일에 포함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하 의원은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으로 지정하고 있으나, 공휴일의 일수가 늘고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져 법률로 제정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라고 법률안 제정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고령화에 따라 노인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히 전개, 사회 전반에 걸친 공헌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며 “노인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 노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일깨우고 효친경로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자”라고 강조했다.
노인의 날 국가 공휴일 지정 추진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 현실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노인문제 해결에 국민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 인구 비율은 14.9%로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 2060년 43.9%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40년 우리나라의 고령화 비율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된다.
일본은 이미 1954년 노인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한 반면,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2020년 10월2일 제24회 노인의 날에 즈음하여
-1968년에 노인의 날 만든 이돈희 다시 올리는 글
-출처 : 『참좋은이들 21』 2006년 5월호 특별기고
'대통령·장관·국회의원님,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십시오!'
" 5월의 어버이날과 10월의 노인의 날이면 생각나는 것"
이돈희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 만든이 (감정평가사 · 예수님생애연구소장 ·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저자)
선린상고(현 선린 인터넷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에 <아버지날>과 동국대학교 4학년 때인 1968년에 <노인의 날>을 만들었던 필자는 만들고서 남다른 걱정이 있었다.
실종되어가는 효사상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아버지날>을, 경로사상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노인의 날>을 청소년때 만들고서도, 이름마저 너무 없다보니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런 일은 발로 찾아다니며 발굴해야 하고, 좋은 여론을 선도해야 할 그 수많은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 매체마저 무명인인 필자가 가까이 하기엔 이광조의 노래가 아니라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떻게 그리 쉽게 무시하고, 대꾸조차 안 해주는지 어렵게 찾아간 유명인사나 언론기관에게서 거절에 거절을 당할 때마다 가수 이남이의 히트곡처럼 ‘울고 싶어라’였다. 무명인의 비애를 절감했다.
이 일을 해 볼수록 필자가 하나의 ‘작은 유리구슬’과 같은 존재라면, 각 가정과 특히 사회와 국가는 ‘너무도 큰 바위’임을 절감했고, 행여나 부모를 잘못 만난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어릴 때부터 건강이 매우 나쁜 나의 사망(死亡) 함께 사장(死藏)이 될 것만 같았다.
솔직히 필자는 철들기 전 서너살 때부터 온갖 잡병(雜病)을 지니고 살다보니, 기초 체력이 없는데다 나이 59세가 되는 지금까지도 치료를 위해 각종 병원과 한의원과 약국을 내집 드나들듯 했고, 여러가지 수술도 했고, 한창 좋은 나이인 대학생 시절마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치유되었는 줄 알았는데 1년만에 재발까지 되어서 몇 년 간 더 고생을 한 후론 건강에 도대체 자신이 없었다.
건축현장 소장으로 부산 광안리 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시던 아버지에게 "아버님전 상서! 아버님께 불효만하던 제가 곧 죽을 것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도 각혈을 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마음대로 숨을 쉴 수도 없고, 나날을 이렇게 아프기만 하니 이렇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제가 죽는 것이 멀리서 온갖 고생하시는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불효를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애써 벌어 주신 등록금으로 다닌 대학의 졸업도 1년이 채 안 남았으니, 졸업도 하고 싶고, 졸업 때까지만이라도 꼭 살고 싶습니다." 란 요지의 편지를 유서로 보내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이상의 불효가 아니도록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걱정을 끼쳐드렸는지 모른다. 82세이던 작년에 폐혈증으로 작고하신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 자녀들이 각 가정의 아버지에게 효도하자고 고등학생 때 <아버지날>을 만들었음에도 대학을 다니면서 자식으로서 정작 아버지 마음을 너무도 몰랐던 어리석음을 석고대죄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유서에 쓰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국가에서 제정되고 그 결과로 각 가정과 사회에서 부활되는 효친경로의 모습들을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청년으로 한창 건강할 나이인 대학생 때에도, 두 시간 연속되는 강의는 허리가 아파 그냥은 못 듣고, 강의 중에라도 염치불구하고, 학기말 시험 범위를 알려준다 해도 반드시 강의실 근처에 있는 잔디밭이나 벤치에 나와서 잠시라도 누워있다가 다시 들어가야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한참 수업을 듣고 있는데, 잔디밭이나 벤치에 혼자 누워 있을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구름, 이리저리 나풀너풀 날아다니는 흰나비 마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만들긴 했지만, 아무도 호의를 가져주지 않아서, 이를 신문과 잡지에 광고하는 캠페인 비용을 벌고자 주중에는 중고등학생들의 가정교사를 했고 주말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신문 가판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2학년 내내 폐결핵으로 고생했는데, 4학년 때 재발이 되자 처음 발병 때보다 기침도 심하게 하고 오랫동안 각혈이 멈추지 않을 때면, 결국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0년代만 해도 폐결핵은 참 무서운 병이었다. 의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성과 없이 죽어가는 병이기도 했으니까.
몸 아픈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벌어도 벌어도 여의치 않아, 주사비와 약 값이 모자랄 때는 학교를 오가다 중구 보건소에 들려서 필요한 약은 타 먹었지만, 각혈이 심할 때는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마저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수고하셔서 마련해 주시는 등록금만도 미안한데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언제 제정될지도 모르는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드는 신문 잡지의 광고료까지 부모님의 신세를 질 수는 없어 내 힘껏 벌어서 하고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이화여대를 찾아가 1968년 5월 20일자 <이대학보>에 조그맣게 <아버지날> 광고를 낸 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받았던 가정교사 보수로 했고, <이대학보>도 돈만 생기면 잡지든, 신문이든 아버지날을 광고하던 신문 중의 하나였다.
물론 당시에도 많은 대학교와 대학신문이 있지만, 돈이 없는 대학생 필자가 모든 대학신문에 아버지날을 알리는 광고를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남자대학교의 무뚜뚝한 아들들보다는 여자대학교의 귀여운 딸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 딸들이 제일 많이 다니고 졸업생이 많은 여자대학교인 <이화여대>의 학보인 <이대학보>에 광고하면 머리 좋고 효심 많은 이화여대생들이니, 아무리 작은 지면의 광고라도 아버지날 제정하게 하자는 나의 뜻에 공감하고, 그 광고를 본 이화여대에서 언젠가는 아버지날을 만들고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숙명여대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광고는 이화여대에만 했었다. 내게 광고할 돈이 더 있었다면, 분명히 우리나라의 2대 명문 여대인 숙명여대에도 광고를 했을 것이다. 이점 지금도 해당학교인 숙명여대는 모르고 있지만, 당시에 숙명여대에도 꼭 <아버지날>광고를 하고 싶었었음을 이대학보에 광고를 한 지 38년이 지난 시점인 오늘 숙대인(淑大人)들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필자는 선린상고를 다녔기 때문에, 선린상고의 인근에 소재한 숙대를 잘 알고 있었고, 누나가 없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숙대에 다니는 누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숙대 앞을 지나가거나 숙대 뱃지를 단 누나들을 볼 때마다 혼자 남몰래 선망하던 시절이었기에 대학생이 된 후에도 숙대를 좋아 하고 있었다.
각혈을 하고 잔디밭에 누워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진 것은 신약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늘 용기를 주시는 은혜를 믿었기 때문이다. 중 3학년 올라가면서 세례를 받았는데,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바로 ‘사라져가는 효친경로사상을 부활시키라.’ 였기에, 나쁜 건강을 무릅쓰고 기도하며 살아갈 수가 있었다.
기독교 계통학교인 이화여대 신문에 광고를 하게 된 것도 예수님이 주신 아이디어였고, 그 아이디어로 이대학보에 광고한 지 만 3년이 지난 1971년 6월 12일에 드디어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이화의 아버지날>이 탄생하였음은 꿈이 아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다. 아버지날을 만든 이화여대에서 "이화의 아버지날을 발전시켜서 앞으로는 전국적인 아버지날로 하겠다." 고 하였으며, 이후 이처럼 아버지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박정희 정부에서 ‘우리나라에 무슨 날 무슨 날 해서 날이 너무 많으니, 외국처럼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행사하고 기념하기 보다는 두 날의 뜻을 합친 어버이날로 하기로 한 것’이 1973년부터이다.
근엄하신 박 대통령이 아버지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점은 필자의 훗날 졸저(拙著